앗수르 제국의 몰락
에살핫돈의 후계자 앗술바니팔(Asshurbanipal, B.C. 669-633년)은 즉위 초 애굽 원정길에 올라 애굽의 디르하가를 살해하고 애굽을 앗수르 영토로 귀속시켰다. 하지만 앗수르 제국 내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이어졌고, 바벨론에서는 앗술바니팔의 친형인 샤마슈 슘 우킨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국이 소용돌이 쳤다. 앗술바니팔은 이 혼란들을 진압하고 잠시 안정된 치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앗술바니팔이 죽자 앗수르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고 주변국들은 속속 앗수르의 지배권에서 벗어나는 등 중근동 지역의 대변화가 진행된다.
특히, 앗술바니팔이 사망한 직후, 바벨론(갈대아인)의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25-605년)이 즉위하면서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 나보폴라살은 메대인들과 동맹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침공하여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키게 된다(B.C. 612년). 나훔과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나 1:1; 2:10; 습 2:13). 그후 바벨론은 새로운 패권국으로 역사 앞에 등장하게 된다. 한편 성경에서는 나훔과 스바냐 외에 여러 선지자들(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미가, 스가랴 등)이 앗수르에 대해 언급했으며, 특히 선지자 요나는 앗수르 수도 니느웨로 보냄받아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도 했다.



바벨론
수많은 고대 도시 중에서도 지금까지 전세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영광과 굴욕이라는 양 극단을 맛본 도시는 바빌론밖에 없다. 유프라테스강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일찍이 세계의 중심이라고까지 불린 이 도시의 특징은 바둑판처럼 뻗어 있는 도로와 그 주위에 서 있는 채색 타일로 장식된 벽돌,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 건축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건물은 '바벨탑'과 '공중정원'이다.
경탄스러운 고대의 성채 도시
바빌론이 어떤 도시인가를 설명하자면, 그 도시는 광대한 평야 가운데 있으며 사각형의 모양을 가지고 사방으로 각각 120스타디온의 길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도시의 전체 둘레는 480스타디온이다.
바빌론의 규모는 이처럼 거대한 것이었는데, 바빌론은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이기도 하다. 우선 물이 가득 차 있는 깊고 넓은 해자(垓字)가 도시 주위에 둘러쳐져 있고 이어서 두께가 50페큐스, 높이 200페큐스의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성벽 위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1층 건물 두 채를 서로 마주보도록 세웠는데 그 건물들 사이에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빈 공간이 있다. 전체 성벽을 따라 100개의 문이 있는데 모두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고 문기둥도, 상부의 횡목(橫木)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B.C. 425?)가 경탄하면서 기록한 이 도시의 모습은 현대인까지도 흥분시킬 만큼 장대한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책에서 표시한 단위를 미터로 환산하면 도시의 한 변 길이는 21킬로미터이며 총 둘레는 85킬로미터다. 도시 주위에 파놓은 해자를 따라 세워진 성벽의 경우는 두께가 25미터, 높이는 89미터나 되는 규모다. 다만 이것은 조금 과장된 숫자라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그 바깥 둘레는 대략 16킬로미터라고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크기는 런던 시(市)의 규모에 필적한다. 도시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사람은 헤로도토스뿐만이 아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에서도 '가장 크고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표현되어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을 볼 도리가 없다. 이미 기원전에 이 도시는 잿더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그 전모가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 바빌론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람은 역시 헤로도토스말고는 없다. 다만 그가 기록한 것은 소위 '신(新)바빌로니아1)' 시대의 바빌론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보자.

발전과 붕괴의 역사
우선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에 대해서 그 역사를 여기에 소개한다.
바빌론의 기원은 B.C. 3000년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때는 바빌로니아 제1왕조2)의 6대째 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B.C. 1750) 시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시킨 뛰어난 군사적 수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법률, 도시 계획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바빌로니아3)의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지배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4)을 제정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법전은 석비(石碑)에 새겨져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함무라비 왕은 그 뛰어난 재능을 도시나 궁전, 신전 건축 등에서도 발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활약을 기록한 글은 거의 현존하지 않으며 현대의 발굴작업 중에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후에 바빌론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길 만한 흥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함무라비 왕의 후계자들은 점차 세력이 약해져서 B.C. 1595년에는 히타이트5)의 공격을 받았다. 이 때 신전이나 왕궁은 파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기원전 8세기 무렵에 흉악하고 난폭한 아시리아6)의 공격에 의해서였다. 아시리아가 저지른 파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서 바빌론은 늪지처럼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B.C. 625년에 다시 독립하여 나보폴라사르 왕(Nabopolassar: 재위 B.C. 626~B.C. 605)이 주변의 여러 국가들과 연합해서 아시리아을 멸망시키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칼데아 왕조)'을 건설했다. 이 나보폴라사르 왕의 아들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enezzar Ⅱ: 재위 B.C. 605~B.C. 562)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제국을 더욱 강한 나라로 확대했다.
성서 속에서 그의 '악명'만이 눈에 띄는 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전투' 7)에서 승리하여 방대한 전리품과 함께 많은 유대인 포로를 연행했기 때문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확하는 밀, 대추야자, 나아가서는 양털 등을 가지고 외국과 교역을 시작하여 엄청난 부를 손에 쥐었다. 그는 또한 제국 전역에 공통된 도량형을 제정하였고 은행제도 등 금융도 발달시켰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아버지가 못다 이룩한 사업에 투자했다. 즉 그의 시대보다 1천 년이나 전에 번영했다는 '황금시대의 바빌론'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예전의 건축물들은 외적의 침입이나 전쟁으로 인해 황폐하여 그 옛날의 모습은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자 2대에 걸친 권력자는 그 영광을 새로이 일으키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도시 재건을 위해서 '북에서 남까지, 산간지역에서 해안지대까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헤로도토스에 의하면)라고 절찬받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이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생활을 구가했을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 도시를 '세계의 배꼽', 말하자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지라고 불렀다. 그럴 정도로 부가 집중되고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죽은 후에 급속하게 쇠퇴되어갔다. 그의 후계자가 수도를 다른 도시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윽고 세력이 강해진 페르시아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바빌론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전 도시 -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아버지와 2대에 걸쳐서 집념을 불태웠던 도시 재건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선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것처럼 도시 주위에 해자를 만들었고 그곳에 이중으로 높고 두꺼운 성벽을 둘러쳤다.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서 성벽에는 탑이 달린 대문을 아홉 군데나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정문인 이슈타르 문(門)이다. 좌우로 탑이 있는 이 문은 황소나 용, 사자의 모습을 그린 채색 벽돌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들 건물이나 벽은 벽돌로 만들었고, 접착을 위해서는 아스팔트를 사용했다.
이 아름다운 이슈타르 문을 지나서 성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는 바둑판처럼 도로들이 교차하고 있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온 운하가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도로를 '행렬 대로'라고 불렀는데 길이 900미터, 폭 20미터나 되는 중앙 대로였다. 좌우의 벽에는 동물들이 채색 벽돌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왕궁이 있었고 신들을 모시는 '성역'이 있었다.
왕궁은 안뜰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왕실관리의 거처, 근위병 병사(兵舍), 의식용 광장([보좌]의 강당), 왕의 사저(私邸), 시녀들의 관사이다. 의식용 광장은 넓이가 50미터나 되는 규모였다. 이 부근에는 나중에 소개하는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성역은 도시 안에서도 가장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는 '신전 도시'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출토된 비문에 따르면 바빌론 시내에는 '위대한 신들의 신전 53, 마르두크 신8)예배소 55, 대지 신 예배소 300, 하늘 신 예배소 600, 신들의 제단 400'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신앙생활 중심에 위치하는 곳이 성역이었다. 물론 이 성역은 그들이 가장 숭배하는 '만물의 창조자'이자 '전 우주의 중심'인 마르두크 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성역에 있는 에사길라 신전은 높이가 45미터나 되는 커다란 건축물로, 내부에 자리하는 신상, 의자, 테이블 등이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중량은 20톤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공중정원'과 함께 바빌론의 명성을 높인 유명한 건축물이 그 웅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사는 바빌로니아인들은 지적인 호기심이 매우 왕성했다고 한다. 바빌론뿐만 아니라 그들이 건설한 각 도시의 신전에는 반드시 서기학교(書記學校)가 병설되어 많은 학문이 꽃을 피웠다. 특히 유명한 것은 천문학(점성술), 의술, 수학이었다.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비문에는 그들이 '이슈타르(금성)의 각(角)'이라 부른 초승달에 대한 글이 있다. 또한 목성이 가진 네 개의 위성에 대한 관찰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육안으로는 절대로 볼 수가 없는 것들이다. 농경 민족에게는 자연이 주는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홍수에 대한 예측이나 수확 시기의 결정 등에 정확한 천체 관측이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지금도 사용되는 10진법, 60진법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유산이다.
1938년 무렵 어느 독일인 고고학자가 바그다드 근처의 유적에서 기묘한 물건을 발굴했다. 그것은 목 부분을 아스팔트로 씌운 도자기 단지와 동으로 된 원통에 들어 있는 철 막대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GE사의 기술자가 이 장치를 복원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전지(電池)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이 '전지'의 발굴지 부근에서 아무리 보아도 전기 도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물건이 몇 점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전지뿐만 아니라 전기도금의 지식까지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늘과 땅의 연결 고리 - 바벨탑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바빌론이라는 고대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두 가지 전설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바벨탑'에 대해서 소개한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야훼께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11:1~11:9)
바벨(Babel: 신들의 문)이란 히브리어로 바빌론을 가리키는 말인데, 히브리 사람은 Balal(혼란스럽게 하다, 어지럽히다)로 해석했다. 성서에 따르면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건설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려는 오만한 마음의 표출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도시에 모이는 사람들의 언어를 제각기 다르게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이 탑은 바빌로니아 지방의 독특한 건축물이며 '지구라트(Ziggurat, 聖塔)'라고 불렸다. 원래 수메르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단을 여러 층으로 겹친 건축물로, 위로 갈수록 작아져서 말하자면 사다리꼴의 피라미드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주위로는 계단을 만들었으며 가장 높은 곳에는 신전을 세웠다.
지구라트란 바빌로니아 말로 '하늘의 산'을 뜻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왕의 묘'인 것에 비해 지구라트는 신들과 교신하기 위한 '하늘과 땅의 연결 고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B.C. 3000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바빌로니아 각지에 대략 서른세 개의 지구라트가 있었다고 한다.
우주의 중심 - 지구라트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빌론 도시의 중앙에 건설되었고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는 '에테메난키(Ethemenanki: 하늘과 땅의 집이라는 뜻)'의 지구라트를 가리킨다. 이것에 대해서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성역 중앙에 가로와 세로가 모두 1스타디온(약 177미터)이나 되는 튼튼한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 위에 제2의 탑이 서 있고, 다시 그 위에 또 탑이 서 있는 식으로 해서 8층에 이르고 있다. 탑에 오르기 위해서는 탑 바깥쪽으로 모든 층을 둘러싸듯이 나선형의 통로가 나 있는데 그것을 이용한다. 계단을 가운데 정도까지 오르면 층계참이 있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의자가 놓여 있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여기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린다. 꼭대기의 탑에는 커다란 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 속에는 아름다운 천으로 덮인 커다랗고 긴 의자가 있으며 그 옆에 황금 탁자가 놓여 있다. 신상(神像)같은 것은 이곳에 일체 안치되어 있지 않다.
(『역사』)
실제로는 이 지구라트의 크기는 1층의 한 변이 90미터, 높이도 90미터로 7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것처럼 지구라트 가장 위층에 있는 신성한 장소에는 아무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에테메난키의 지구라트에도 화려한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 벽돌로 각 층마다 색깔의 구분이 되어 있었다. 1층은 토성을 의미 하는 검은색, 2층은 금성의 흰색, 3층은 목성으로 붉은색, 4층은 수성으로 파란색, 5층은 화성을 의미하는 녹색, 6층이 달의 은색, 7층은 태양의 금색이다. 그리고 정상에 있는 신전은 푸른 에나멜 벽돌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성들은 각각의 신들9)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상을 해보라. 폭과 높이가 모두 90미터라는 거대한 사다리꼴의 성단이 하늘을 향해서 높이 치솟아 있는 광경을 말이다. 그것도 각 층마다 아름다운 색깔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막 지대의 푸른 하늘 아래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장려한 건물. 그것을 보고 몸이 떨리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신바빌로니아가 탄생했을 때 이 지구라트는 이미 1층만을 남기고 붕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아버지와 함께 그 복원에 집념을 불태운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굴욕적인 종말
이러한 여러 가지 건축물을 자랑하며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번영을 이루었던 이 도시는 그 종말 또한 순식간이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바빌론의 이름이 '타락'과 '악'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당시 유다 왕국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세 번에 걸쳐서 공격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귀족들과 군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바빌로니아로 연행해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수 같은 존재였으니 아무리 증오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바빌론이 '큰 음녀(淫女)'로 나와 있다. 음녀라고 불린 이유는 바빌로니아 땅에서 오래 전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여신 이슈타르11)때문이다. 그녀는 전쟁의 신이면서 땅의 모신(母神), 즉 농경의 풍작을 약속하는 여신으로 바빌론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식물 신인 남편과 성 행위를 하는 것으로 곡물의 수확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자비로운 창녀'라고도 불렸다.
또한 이슈타르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는 '신성한 창녀'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결혼을 앞둔 처녀는 의무적으로 신전으로 가서 7일 동안 참배하기 위해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몸을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이러한 존재는 '타락'의 상징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 예언처럼 바빌론의 도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겨우 4반세기 만에 페르시아 건국의 영웅인 키루스 2세12)의 손에 멸망했다.
이렇게 해서 바빌론의 아름다운 도시와 함께 장대하고 화려한 바벨탑, 공중 정원은 모래 속에 파묻혀서 흙으로 돌아가버렸다. '지상낙원'이라는 몇 가지 믿을 수 없는 전설을 남겨놓은 채 역사의 저편으로 멀어져갔던 것이다.





오늘날 이란을 일군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는 메대-바사 연합 왕국 페르시아를 일구어 오늘날의 이란의 토대를 일군 진정한 군주였다. 남한 면적의 18배에 달하는 큰 영토를 가진 대국인 오늘날의 이란은 우리나라처럼 산지가 많고 현재 전 인구 98%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국가 공식 명칭도 이란이슬람공화국이다. 이란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근본주의자 호메이니를 따라 오늘날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이슬람 왕국을 구축한 나라가 되었다.
이란은 한때 우리 민족을 먹여 살린 한국의 중동 지역 건설 진출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국가였다. 과거 대제국 페르시아 왕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일까? 이란은 지금 동서양을 통과하는 교통로에 위치하며 핵보유국으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위협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성경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21세기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등장한 이란은 과연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어찌되었든 메대-파사는 생각보다 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민족임은 부인할 수 없다.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정확히는 고레스 2세, 통치 기간 주전 559-530)는 놀랍게도 성경에 예언된 왕이었다(스 1:3).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200년 전 고레스에 대해 거듭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이사야 41장에서 시작하여 48장(15절)에서 끝나고 있다(사 41:2, 사 44;21-28; 45:1,5; 46:11; 48:15).
에스라서 1장은 고레스가 마음이 감동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詔書)도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자기에게 주었고 자기를 명하여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 공포하면서 포로들의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심지어 물질적 도움과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스 1:1-4). 성경은 이것이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대로 된 일이라 설명하고 있다(스 1:1).
고레스는 자기 이름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기에 이런 조서를 내린 것일까? 고레스가 참 된 신앙고백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경 예언에 놀라고 큰 감동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다. 비록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왔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미 지금의 이란 곧 메대를 중심으로 바사까지의 고을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레스처럼 성경 계시에 감동하고 다리오처럼 이란 통치자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란이든 이스라엘이든 오늘날 온 중동의 나라들은 마음 밭이 온통 그곳 광야처럼 메마르기만 하기에 하는 말이다.
메대-바사(마대-페르시아)의 신제국 이란의 미래는?
과연 언제쯤 성경 역사의 땅 그곳에 참 찬양이 울려 퍼지는 날이 올까?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강한 이란은 다윗과 솔로몬처럼 어느 민족보다 시(詩)를 지극히 사랑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얼마나 시(詩)를 좋아하시는 지 시인 솔로몬은 인류 최고의 지혜자가 되었고, 찬양 시인이요 음악가요 임금이었던 다윗은 성경 2930명의 실명 인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최근 마대와 엘람의 후손 이란과 아브라함 후손 이스라엘과 핵문제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앙숙인 이스라엘과 이란이 함께 더불어 중동 변화를 이끌 극적인 신앙적 회심의 역사가 언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이란이 2017년 “신라와 페르시아, 그 공동의 기억”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란(마대와 바사)은 정말 보기보다 우리 민족과 닮은 점이 많은 민족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근거는 오직 성경에서 출발한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이번 호부터는 현재 대부분 이란 땅인 고대 페르시아 지역 성지를 순례하려 합니다. 페르시아 통치 시기에 구약성경의 대부분이 집필되었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과 현대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부분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적 배경과 성경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의 이란, 성경 속 바사 왕국인 페르시아로 함께 떠나 보겠습니다.
이란의 제2 도시이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이스파한(Isfahan). 메데 시대부터 2500여 년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에서 양탄자와 차(茶)는 그들의 정서를 담아낸다. 이스파한에 풍요를 공급하는 자얀데강에는 하루 5번 정한 시간이 되면 모슬렘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맘광장의 이맘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이맘모스크는 1611년부터 18년간 지어 1629년에 완공됐다. 건설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생명의 상징이라는 ‘푸른색’ 타일로 만든 이맘광장의 이맘모스크. 그 속에는 이란의 역사를 이끈 정신이 들어 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이란은 어떤 특징을 지닌 나라인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교수: 성경의 배경이 되는 성지(聖地)는 12개 나라입니다. 그중 가장 동쪽에 있는 이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성지라는 인식이 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란은 영토가 넓은 나라답게 다양한 지역적 특징을 지녔습니다. 나라 외적으로는 서쪽에 바벨론 유적이 남아 있는 이라크가 있고 동쪽에 파키스탄이 있어 외교적으로도 복잡합니다. 면적은 한반도의 7.5배인 164만 8000km²로 대단히 큰 나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산악지대와 사막지역이라 많은 땅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 사계절이 뚜렷해 기후가 다양합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은 아랍인이 아니어서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사용합니다. 주변 국가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릅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이란의 고대 명칭은 페르시아, 성경에는 바사라고 하는 이 왕국은 구약에 어떤 나라로 기록됐는지 궁금합니다.
차준희 교수: 페르시아라고 부르는 바사 왕국은 B.C.539~B.C.333년 시기에 고대 근동의 패권(覇權)을 쥔 대제국이었습니다. 바사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하고 B.C.587년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면서 이스라엘 자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그 후 B.C.539년 바벨론이 바사의 고레스 왕에 멸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사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이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인구 교환 정책에 따라 식민지 민족을 자기들이 지배하는 전체 나라에 흩트렸습니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유다 지도계층인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바벨론에 끌고 갑니다. 이는 국가 재건(再建)을 사전에 방지할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을 지배한 페르시아는 바벨론 등 다른 나라가 포로로 잡아 온 식민민족의 문화와 종교에 관대했습니다. 특히 유다 민족에게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지으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대하36:23). 이 때문에 성경에는 페르시아 제국과 고레스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바사의 왕 고레스를 가리켜 ‘하나님의 목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옛 바사 제국 시대에 일어난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습니다. 이란은 구약성경의 역사와 상당히 관련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들의 무덤이 독특하게 모여 있는 낙쉐 로스탐(Naqsh-e Rostam)이라는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란의 현재 수도 테헤란 남쪽에 있는 낙쉐 로스탐엔 고대 페르시아 왕들의 무덤이 있다. 주검의 행렬이 2400여 년간 이 무덤 계곡에 이어져 왔다. 이곳엔 에스라 선지자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2차 귀환, 느헤미야를 통한 3차 귀환을 하게 한 아닥사스다 1세, 악메다에서 고레스왕의 칙령을 찾자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며 물자와 자재를 지원해 줘서 성전을 완공하게 한 다리오왕, 위대한 믿음의 황후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왕 그리고 다리오 2세 등 구약성경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왕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이스라엘 포로기와 연관된 바사 왕국 왕들의 주검이 낙쉐 로스탐 무덤계곡에 모여 있는 것이다. 구약 세계의 후기를 장식하는 바사 왕국은 이란의 고대사 속에 산 역사였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산 절벽 바위를 깎아 굴을 파듯 만든 저 무덤들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교수: 낙쉐 로스탐은 ‘로스탐의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로스탐은 고대 이란 사산 왕조 때 페르시아에서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으로 알려진 사람인데, 그 사람을 상징하는 그림이 벽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쉐 로스탐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있는 무덤 중에 주인이 분명한 것은 이름이 적혀 있는 다리오왕의 무덤입니다. 또 그중 하나는 다리오왕의 아들이자 성경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합니다.
윤석전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바사에 포로로 끌려온 것이 바사 제국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는데, 그 점을 설명해 주세요.
차준희 교수: 바사 제국은 B.C.539년에 와서 세계사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B.C.587년에 멸망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사에 포로로 끌려온 사건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사에 오게 된 배경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이 바사 제국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B.C.722년에 앗수르가 세계를 통치할 때 인구 교환 정책에 따라 식민지 백성을 잡아다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바사 제국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 일과 관련해서 성경에 처음 언급되는 구절이 열왕기하 17장 6절입니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이 구절에 나와 있는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 이곳이 바사 지역입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바사 지역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B.C.722년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였고, B.C.587년 바벨론이 바사 제국에 멸망하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간 식민지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에서 보낸 포로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의미를 심어 주었나요?
차준희 교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국가가 멸망할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망하는 정치적 문제를 만나면 이를 신앙으로 해석하고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과거에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보이셨던 구원의 역사를 글로 남겨서 후손을 가르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남하하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 예언자인 아모스나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들을 기록해서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통치하에 있던 때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기록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느8:1). 이 구절에서 말하는 모세 율법책이 오늘날의 모세오경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이 패망의 때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글로 기록하는 창조적 시기였습니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페르시아 통치기에 완성됩니다. 이것을 보면 인생의 역경기가 오히려 창조적 시기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창조적 시기’라는 것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차준희 교수: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처음 포로로 잡혀간 이후 페르시아 시대까지 300~400년간 나라 없이 이방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잊지 않고 후손에게 알려 주려고 자기들의 역사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으로 남겨서 역사적·정치적 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해 냈습니다. 그 기록이 신앙 유산으로 남아 그때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구약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우리 신앙인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 여러분, 지금 어떤 역경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지난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해 보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셔서 우리가 역경 속에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속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아버지의 능력으로 영육 간에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44)] -고대 페르시아 '바사제국' (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목장) | 작성자 A예수사랑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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