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만약은 없다

by 헣푸로 2021. 1. 10.

이제부터 여러분은 죽으려 했던 자가 죽음 안에서 뛰어다니는 기록을 보게 될 것이다.

 

죽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오히려 살고자 하는 열망처럼 보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나간 사람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불행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보다도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기로,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CT사진에서 대못은 그의 안구를 관통하고, 안구의 형태를 지탱하는 뼈를 부수고서야 멈췄다.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 번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수고하셨습니다."

참 따뜻한 말이다.

머리를 자르라고 요구한 것도 나고, 머리가 짧아진 것도 나지만,

수고한 것도 나였다는 미안한 표현,

자신의 노고를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황송해진다.

 

나는 잠이 들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응급실 문밖을 나섰다.

전날 내려 쌓인 눈이 사람들의 발길에 뒤섞여 검게 곤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온 거리가 진창이었다.

'아 어제 눈이 내렸구나. 성탄절의 하얀 눈...... 사람들은 눈을 맞으며 행복했겠구나'

나는 기절할 것 같은 정신에도, 내가 도저히 가질 수도, 알 수도 없었던 행복에 관해 생각하며

진창이 된 거리를 걸어나갔다.

이대로 잠이 들면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기억되고 다음날이 될 것이었다.

내가 딛는 발걸음마다 검게 곤죽이 되고 짓뭉개진 눈죽이 붙어 불결하고 서늘한 기운이 발뒤로 끌려가고 있었다.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통령의 글쓰기  (0) 2021.01.29
장발장  (0) 2021.01.19
어린왕자  (0) 2020.12.28
언어의 온도  (0) 2020.12.11
정글만리  (0) 2020.02.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