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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헣푸로 2021. 10. 18.

‘맥락화의 함정’ - 칼 폴라니

 

반재벌 →반기업→반시장→사회주의→공산당으로 연결되어 ‘재벌을 반대하는 것은 공산당’

‘좌파’라는 말이 나쁜 뜻이 아님에도 좌파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말을 조심하게 된다. 

비슷하거나 부분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양 위장해서 대중을 현혹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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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 확산

영국의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1990)

 

신자유주의가 대두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와 마르크시즘의 후퇴다.

금에 달러가치를 고정하는 브레턴우즈체제가 1960년대 중반 이후 흔들리다가 1971년 완전히 붕괴된 후 자유변동환율제가 확산되면서 인플레이션이 고조되었다. 각국 정부들에 자본주의의 구조적 방해물을 제거하라는 압박이 가해졌고, 1980년대 이후 레이건과 대처정부에 의해 새로운 보수경제정책이 등장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어리석은 일이며, 시장과 기업에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사고가 성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때부터 시장은 ‘신’이 된 것이다. 도쿄와 대도시의 전력소비를 감당하기 위해 평온한 어촌마을에 원전이 대거 건설되고, 그 결과 재앙은 그 에너지소비의 주체가 아닌 원전 주변 주민들에게 닥친 것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것들에 의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건강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이므로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건강이 주는 행복은 행복 자체가 아니라, 불행하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불행의 끝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새무엘슨이 제시한 행복의 공식이 맞다면, 가진 것을 대폭 늘린 지금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케인즈는 “가진 것을 늘리려면 가지려는 욕망이 그보다 더 크게 자라야 한다.”고 답했다. 즉 더 가짐으로써 행복해진다는 믿음은 마치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했던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은 것이다. 해법은 결국 절충, 즉 욕망의 대상을 전환하는 데 있을 것이다. 더 가지려고 노력하되, 일정 수준 이상에서는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닌 사회를 향함으로써 욕망을 선량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케인즈가 <내 후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통찰력 깊은 에세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개인의 경제적 성취와 소수집단의 부만을 대상으로 삼을 때 욕망은 날카롭고 사악하며 통제 불가능해지지만, 그 대상이 사회 전체로 넓어지면 욕망은 부드럽고 선량해진다. 결국 이런 욕망의 상대적 통제와 전환만이 행복의 방정식을 완성하는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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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한다. –파스칼

 

성과의 차이가 능력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태도의 차이, 즉 집중력의 차이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외적인 요인은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한 다음에야 거론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적인 요인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태도는 남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자 내가 성공에 이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의 장난이다.

심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듯한 자기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무의식에 농락당한 에고의 비명소리에 불과하다. 걸어가다가 주저앉는 자리가 바로 한계인 것이다.

한계를 규정하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지만, 한계를 넘어선다고 생각하면 심리적 한계는 그보다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혁명가의 삶은 늘 진취적이고 의욕이 넘치지만 안주하는 사람의 삶은 늘 회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혁명가로 살아야 하고 이런 혁명가의 삶만이 자기가 주인인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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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 감각적인 것들을 향한 욕망이 강할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침묵과 사색, 교양과 문화다.

이런 것들은 대개 호흡을 가다듬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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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을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알아채는 과정이 필요한데,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잠재력은 체험을 통해 발견된다. 모든 일을 체험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이 간접체험이다.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고, 문화예술을 접함으로써 자신의 영감을 테스트 해 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곳에 여행을 다니고 봉사활동에 참여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재능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준비는 호기심이다.

친구를 만나도 나와 의견이 다르고 같이 있으면 긴장감이 생기는 친구와 만나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창조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늘 즐기던 분야의 책만 읽는다면 그것은 익숙한 놀이지 호기심이 아니다.

늘 다니던 곳만 여행한다면 그것은 산책이지 호기심이 아니다.

처음 가 본 곳에서 만나는 낯선 환경,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르는 당황스러운 상황,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극복해 나가는 경험만이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물한다.

나에게 많은 것을 마주하고 대면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영감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의 잠재력을 찾는 순간이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을 선망하기 보다는 타인의 성과를 질투한다.

질투와 선망은 천지차이임에도 그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가슴이 떨려야 한다.

그가 큰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나보다 나은 점이 보이지 않아 더 질투가 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때에는 그의 성취를 단지 운이나 과대포장의 결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렇게 내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그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발견조차 못하는 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의 성취에 진심어린 경외를 보여야 한다.

이렇게 상대를 경외하고 선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며, 이로써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지식과 지혜

지식은 특정한 이론을 배워가는 것이다. 지식은 계주다.

누군가가 앞서 증명한 이론을 익히고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든 다음, 내가 다시 이어 달리면서 그것을 늘려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이런 식으로 발전해 왔다.

반면 지혜는 그것을 활용하는 역할을 한다.

지혜가 없다면 불필요한 것을 만들고 어리석은 기술을 발전시키게 된다.

지식은 사회적이고 지혜는 개인적이며, 지식은 전해줄 수 있지만 지혜는 가르칠 수가 없다.

일본의 유명한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신의 검법에 대해 “가르칠 수는 있지만 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지식은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다른 사람과 교류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만 쌓은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지혜는 내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배우거나 가르친다고 이어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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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의 논어 위정편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아무리 배워도 생각하고 이치를 고민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책을 몇 권이나 읽었나요?”라고 물을 때 가장 곤혹스럽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어도 읽은 것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당신이 읽은 책 중에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 책은 몇 권입니까?”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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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니스트가 되고자 하거나 타인을 설득하고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면, 좋은 칼럼을 골라 필사하는 것이 좋다.

과거 <이규태 코너>를 필사한 적이 있는데, 요즘의 글쓰기 트렌드와는 좀 어긋나는 면이 없지 않다.

필자의 글이 무겁고 현학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필사를 할 때에는 열 번 이상 반복해서 그대로 베껴써야 한다.

키보드를 이용해도 좋고 연필을 쥐어도 좋다.

특정 글을 이렇게 열 번 이상 반복해서 쓰면 어느 순간 대상의 문체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다음 순서는 개작(改作)이다.

 

 

타이완의 총통을 지냈던 장징궈(蔣經國). 장제스(장개석)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현명한 리더였던 것 같습니다.

장징궈가 어느날 린양강(林洋港) 타이완 주석과 함께 지방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촌장이 뛰어나와 장징궈에게 갑작스러운 부탁을 했습니다.

"각하, 이곳은 교통이 너무 불편합니다. 다리를 고쳐줄 수 없겠습니까?"

국민의 소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며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장징궈에게 어찌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장징궈는 그런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장징궈는 "내가 높은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지휘계통 때문에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지원금이 나와 다리가 잘 고쳐진다면 기쁜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오늘 온 김에 우선 이름이나 지어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용문교'(龍門橋)라는 휘호를 써주었습니다.

제도를 존중하고 옆에 있는 린양강의 얼굴을 살려주면서 자신의 권위도 세운 것입니다.

린양강은 훗날 이렇게 말하며 장징궈를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미 다리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리 짓는 돈을 지원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더의 지혜로운 말과 행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징궈의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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