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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손희영-

by 헣푸로 2021. 11. 29.

이 세상은 광야일 뿐입니다.

때때로 물질이나 권력 등의 우상들이 우리의 삶을 안위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지만...

유대 광야는 크고 작은 바위 돌이 굴러다니는 척박하고 메마르고 광활한 들, 말라붙은 관목이 여기저기서 자라고 뱀과 전갈이 나그네를 위협하는 곳, 낮에는 타는 듯한 더위가 내리쬐고 밤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사나운 들짐승의 울부짖음이 드리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페르시아) 포로에서 고토로 돌아갈 때 광야를 지나갑니다.

말하자면 제2의 출애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곧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50~70년 정도 포로생활을 하게 되는데 바벨론 땅에서 유다 땅까지 돌아가는 길이 바로 광야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3의 말씀은 첫 출애굽 때 광야에서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던 것처럼 제2의 출애굽인 현재의 광야의 여정도 인도하시고 돌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 사십 년 동안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주변의 이방 민족들보다도 오히려 더 못나고 악하게 구는 등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며 개인적인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인 부패로 나라마저 망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것은 40년 광야생활을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광야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여겨 주신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직 그렇게 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산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의 훈련은 '초월성'을 배우는 훈련입니다. 초월성을 훈련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영역으로부터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도록 배워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 곧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신 것을 말합니다(롬 1:24).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저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부모나 형제나 연인이나 배우자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거나 버림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일반 은총이 여전히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저주나 버림받음은 면한 상태입니다.

 

온갖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악독, 사기, 험담, 비방, 모함, 교만, 건방짐, 자기자랑, 불효, 우매함, 신의 없음, 몰인정함, 하나님을 싫어함 같은 개인적 죄들이 생겨납니다(롬 1:29~31)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유혹하고 속인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악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권리와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인간은 한 사람씨기 개인을 보면 꽤 선하고 도덕적인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는 매우 부도덕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숨겨진 악의 본능의 익명성을 뒤집어쓰고 튀어 나올 때 집단적인 악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에 고통과 악을 허락하실까 물으며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성숙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도 실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은 다 알 수 없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주요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하자고 말했을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가 누구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알아야 용서할 게 아니냐?"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사람이 나무에 달려 죽었을 때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될 때 적용되었던 죄목은 신성모독죄, 즉 사람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을 자칭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원래 율법에는 신성모독죄인 경우 십자가형이 아닌 돌로 쳐서 죽이는 벌을 가하도록 되어 있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순교자가 되어 백성의 추앙을 받게 될까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낙인을 찍기 위해 나무에 달도록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 처형은 오직 국가에 반역한 죄인에게만 주는 극형이었습니다. 너무나 잔인한 형벌이어서 로마시민에게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기 위해 '스스로 왕이라 한다'는 반역죄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같은 그들의 간교한 음모를 멋지게 역이용하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저주를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입니다.(고전 1:24)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은 뒤 옮겨 갈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영적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이중구조 속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출범한 이래로 상당한 시간이 흘러 이미 2천 년이 지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할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와 관계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어 그것을 외면하는 세상에 분노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분노를 공산주의 혁명의 에너지로 생각했습니다. 레닌은 진실한 성직자를 싫어했습니다. 정직한 성직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상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천국 이야기를 통해 그 아픔을 잘 인내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가 안 생기기 때문에 혁명 역량이 축척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일이 나와 관계가 있다고 보았던 연대성에 대한 시각만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원래 성경의 정신입니다. 비록 내가 그 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할지라도, 탄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대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12).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완성된 나라에서 그 열매를 풍성히 가질 때는 얼마나 더 좋을까요? 그때에는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며 분노했던 것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부지런히 답을 구했던 것과 같습니다. "왜 하나님이 계신데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 수많은 논쟁이 있지만 만 결국 답은 "모른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뵐 때까지 이 세상에서 악과 저주를 겪을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인간의 삶속에서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나에게 전혀 책임이 없는 일들로 인해 내가 엄청난 피해를 받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럴 때는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을 내게 주어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난에 존엄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고통은 인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 세상은 비록 광야이지만, 우리는 영생을 이미 누리기 시작했고 그 영생을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창조세계의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자연과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맛보며 이를 통해 재창조의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 있도록 매순간 인도해 주소서. 매일의 평범한 사건들, 매일 아침 잠에서 깨고, 숨 쉬고 호흡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 이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도록 인도해 주소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다'라는 말과 '복을 받다'라는 말이 동의어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공급을 끊으시면 남아 있는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마침내 생명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죄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개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치 때수건으로 몸의 때를 벗기듯 죄를 닦아 내는 일에만 급급할 뿐, 왜 그 죄가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고 하나님을 등진 것이 되는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실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신뢰하지 못해서 그분을 무시하고 산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담고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살아가면 두려움과 불안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것인 까닭에 명백한 죄입니다.

미움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타인에 대한 일종의 자기방어입니다. 그것이 왜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고 나의 의지가 되시는데, 그분을 도외시하고 나의 어리석은 방법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그로 인해 미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죄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도덕적인 죄가 주는 수치감이나 다른 사람의 경멸 같은 것에는 대단히 민감하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것에는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헛되게 한 것,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그릇된 방식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살아온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내적 만족감을 얻게 되면 성적 유혹에 빠지는 데서 많이 자유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적인 깊은 만족감을 얻지 못할 때 가장 손쉽게 찾게 되고 더 깊숙이 빠져드는 것이 성적인 죄입니다. 성적인 환희든 마약이든, 그 쾌감과 도취감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큰 체험 없이 그냥 담담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각각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민감할 수 있는 영혼의 준비가 되었기에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떤 것을 소유하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변화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그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상으로 삼던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버팀목 중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버팀목이 되실 수 있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고 나의 피난처 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나의 보배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열심히 고백은 하지만 실제적인 버팀목은 다른 것들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해서 하나님 없이도, 다른 버팀목을 굳게 잡고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의 버팀목을 버렸을 때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나눔과 노력으로 이 세상의 가난 문제가 다 해결되어 모두가 배부르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좀 더 깊은 차원은 이렇습니다. 내가 확실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는, 끊임없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내 물질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가? 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실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그들을 돕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길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영역을 점차 확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고백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좌절과 실패의 경험은 비록 그것이 죽음 자체는 아닐지라도 죽음을 연상케 합니다. 대학 입시에 낙방하거나 사업에 실패한 것은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 가운데 죽음과 비슷한 것을 경험하며 두려워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때 우리는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 상대적 빈곤감, 사회적 지위나 학력에서 오는 열등감도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일생동안 거기에 매여 종노릇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인간이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매달리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입니다. 내가 스스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확신만 있으면, 먹고 사는 일이 좀 팍팍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해 보여도 넉넉히 살아 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지금 그 분이 내 안에 계신 것이 우리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주셨다는 데서 우리의 가치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인데도 내가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나의 가치가 극대화되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 명칭과 신분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며 감사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것 외에 다른 것들도 많이 있어야 만족하지 않습니까? 내가 집착하던 다른 것들을 다 버릴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진정한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나의 가치 인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으로 인해 나의 가치가 높아진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가치 인정과 나 자신에 대한 가치 인정이 동시에 이루어지면 예배는 샘물처럼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성경에는 고난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없습니다. 다만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결핍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의 죄와 일대일의 상관관계가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 심지어는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고난을 겪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람이 원인이 아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고난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인과관계만이라도 밝히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며 '왜' 그 고난이 닥쳤는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고난의 기원은 사탄이며 인간의 죄와 악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면 그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발생한 악과 고난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허용'하시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로 능히 그것을 원용하셔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저도 이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저 자신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은 멋있게 들리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목숨마저 잃게 되더라도 하나님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비록...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인간은 꼼짝없이 자동적, 강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자유 속에서 기꺼이 사랑해야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반드시 자유라는 대전제가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사랑이란 대상의 상태와 무관한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함직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데도 대상의 상태와 무관하게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로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는 죄 용서를 핵심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를 믿고 있기에 사죄를 너무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선입견과 지식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가지 속성은 얼핏 모순되어 보여서 한 죄인을 향해 이 두가지 속성이 동시에 드러나기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시지만, 죄인인 인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에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 심판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난 복음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이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논할 만큼 한가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두려운 것입니다. 죄인에게 이것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새 시대가 현 시대 속으로 역행해 들어와 새 시대의 첫 부분과 옛 시대의 끝 부분이 겹쳐 있습니다. 시대의 이중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겹쳐 있지만, 새 시대는 그냥 들어갈 수 없는 영역입니다.

 

교회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든 진리를 일깨워주고 우리를 양육하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로의 부름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 가운데 신앙의 냉소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의 감격은 사라지고 피곤하고 지루해 하며 회의적입니다. 삶의 생명력과 활기를 잃고 삽니다. 아직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세상으로 인해, 또 교회와 그리스도인과 자기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회의하고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수고를 마다 않고 교회를 섬기며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열렬한 기대와 사모함, 부활의 몸에 대한 기대와 사모함이 여러분의 영혼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현실의 삶이 지루하고 힘들 때, 좌절과 실망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때에라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지금 이 삶을 성실히 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선포된 복음이란 기독론적으로는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이고

구원론적으로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다음 구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은 기독론적인 설명과 구원론적인 설명을 합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1~22)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거룩에 이르려고 열심을 내는 동안, 예수를 믿으니 적어도 이 정도는 착하게 죄 안 짓고 살아야 한다는 기준과 노력으로 살아오는 동안-그것은 참으로 선한 의도인 것 같은데도-그리스도께서 계심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의 힘이 다 빠져서 탈진하고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자주 겪는 큰 잘못은, 신자로 살아가면서 죄에 빠지거나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 자신이 전보다 나빠졌다거나 영적으로 퇴보했다거나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도록'하게 하기 위해 우리 자아의 주장이 지치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 자아의 주장이 선한 의도처럼 보이고 우리가 그렇다고 주장할지라도 말입니다. 자아는 강력한 자기주장과 자율성을 원하게 마련이며, 종교적인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성향은 더욱 문제가 됩니다.

 

작은 죽음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좌절하게도 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실망과 낭패감을 가져옵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의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인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가능한가?' 과거와는 달리 영적인 감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메마르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도 멀어진 것 같고 찬양도 기도도 뜨거움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이란 말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의 증거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괴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도대체 예수를 믿기는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 신앙생활은 헛것이었구나'하는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우 흔한 경험입니다. 다만 신자들이 정직하게 털어놓지 않기 때문에 감춰진 채 지나갈 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계속 매달리십니오. 금심하며 부르짖으십시오. 좀 더 자신을 내려 놓으세요. 더 강하게 밀어 붙이세요.'라고 재촉하듯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 충고가 못 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느낌, 평안, 기쁨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구하기 보다는 '그 분'을 구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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