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강해설교
비성경적 견해
율법주의자들이 보는 율법에 대한 견해입니다. 십계명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
무율법주의적 견해입니다. 율법이란 오늘의 우리들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십계명을 이야기하는 것 조차 복음적이 아니라는 생각
율법의 기능
율법을 범한 사람들의 죄를 깨우쳐 줍니다. 죄를 각성시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갈3:14)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얻은 증거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이라는 단어는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태도와 의무를 강조합니다.
기독교의 유일신관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다신교는 도덕성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문화와 도덕을 부패와 오염으로 이끌어 갑니다.
'어떤 신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인격이 결정된다.'(윌리엄 바클레이)
범신론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혼동하는 그릇된 신관으로, 화가와 그의 작품을 동일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작품 속에는 화가의 지혜와 기술과 솜씨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바로 화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신론은 만물을 자연의 법칙에만 맡겨 두시고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신론이라고도 합니다.
무신론은 논리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없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인생에 아무런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데... 시편 14:1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불가지론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당신이 아직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하나님은 관심의 나누어짐이 없는 순전한 당신의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우상은 우리가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의 수단이 목적으로 변신되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서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봄으로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민21:4~9)
그런데 열왕기하 18:4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뱀을 모셔 놓고 그 앞에 분향하고 경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냥 하나님이 은혜가 감사해서 그 놋뱀을 기념물로 보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상은 살아계신 인격 대신에 죽은 물건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가 없지만 우상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가 있고, 시각적이어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육적인 도구로 십자가를 사용하고 기독교 교훈의 예술적 상징으로 십자가를 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만일 십자가 형상을 봄으로써 은혜를 받았다든지 또는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있을 때는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든지 하는 등의 사고를 갖기 시작하면 서서히 그 십자가는 우상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이기심에 뿌리박고 있는 육신적 허상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예배는 거짓된 예배입니다. 혹 우리 중에 어떤이가 설교를 듣기 위해서만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예배 정신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것보다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더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그 놀라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으로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나를 죄악과 어두운 수렁에서 건져내여 구원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드리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라는 말은 곧 하나님 자신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 곧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망령되이란 공허하다는 뜻으로 우리말 성경에는 허탄하다, 허망하다, 무익하다, 헛되다, 허사 등의 여러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킬 의도가 없는 헛된 약속이나 서원에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일을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신앙 행위 속에, 예배 행위 속에, 봉헌에, 찬양에, 기도 생활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11)
왜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키지 않는가? 그런 질문은 오늘날 우리는 왜 양을 제물로 잡아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가? 라는 질문과 동일한 류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속죄양이 되셨고, 그 분을 통해서 속죄의 제도는 그 의미가 성취되었다. 안식일도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그 분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심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그 날의 주인이신 주님과 교제하는 일은 얼마나 축복인지요?
주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면, 죽음에서 승리하셨다면, 영생의 소망을 확실하게 해주셨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주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를 헌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날입니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증오는 살인의 원인이 아니라 살인의 시작입니다. 모든 증오의 밑바탕에는 살인의 의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인을 초래하는 모든 유형의 증오의 감정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분노의 감정은 곧 살인의 시작입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 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미움을 죄로 인정하고 그 죄를 고백하십시오.
인간 관계에서 화목을 유지하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여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내가 입어 주님의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다면,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사랑의 본질을, 특성을 "결단"으로 이해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 그것이 아무리 올바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
현대를 흔히 3S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Science, Sports, Sex
히브리인들은 간음이란 기혼자가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이성과 맺는 불법적인 성관계로 이해했습니다.
음행이란 단어는 모든 종류의 성범죄 즉, 강간, 남색, 수음, 동성연애, 매음행위, 혼전성관계 등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체의 성의 남용, 오용 혹은 악용과 관계되는 모든 유형의 성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 단어입니다.
간음은 우리 자신을 파괴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11)
히브리인들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나의 단순한 사회적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성별의 개념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구별의 행위로서 이해했습니다.
깨어진 가정, 부모 없는 고아, 성적 질병의 고통은 모두 간음의 쾌락이 남긴 열매들입니다.
이 범죄는 우리 사회를 파멸시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음행의 범죄였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문화와 오염된 성문화는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순결한 나라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성의 선용은 축복입니다. 초대교회에 유행했던 영지주의와 그 후에 일어났던 스토아철학에 의해 발생한 이원론 사상은 기독교인들의 성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이원론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완전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육체는 더럽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성은 무조건 더러운 것이며, 잘못된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풍조가 있어 왔습니다.
주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5:28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막연한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충동이 아니라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이 찬동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성적 대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속의 계획을 음욕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피하십시오. 간음의 죄, 이것은 싸워야 할 죄가 아니라 피해야 할 죄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유혹할 때 소리치며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망은 이 문제에 대한 최대의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지각하고 두려워하십시오. 사단은 간교하고 사특한 음성으로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이런 죄를 범했는데도 내게 닥쳐오는 아무런 징계도 없지 않는가? 누가 내 행동을 제재하겠는가?라고 말하지만 범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사실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의 방법은 "그대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의 띠를 더욱 굳게 하십시오. 만약 남편이, 아내가 그 문제에 대해 충족한 도움을 베풀지 못할 때 내 남편이나 아내는 가정 밖에서 도움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합니다.
부도덕한 성도덕의 가치 기준을 거부하십시오.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성의 수준에 대해서 찬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도적적인 수준을 약화시키지 마십시오. 나의 도덕적 가치관이 나의 삶의 도덕적 양식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주 방임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내 삶도 그러한 방임된 자리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굳으면 굳을수록 유익합니다. 이 시대의 철학이, 사조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든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과 인격을 말씀과 기도로 채우십시오. 할 일 없어 생각이 유리하고 배회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암송하면서 내 마음 속에 두었던 거룩한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20:15)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십시오. 주일, 십일조..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영광을 내가 받으려 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도적이 되고 맙니다. 다니엘 5장에서 느부갓네살왕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십시오. 부정직한 상거래, 빌리고 난 후 갚지 않는 것, 고용인의 삯을 떼어 먹는 자본주의 행위,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주어 부를 획득하는 것, 부당한 뇌물을 받는 것
자신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재산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과도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롬12:16)
자족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핌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6:7)
올바른 물질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고,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식욕은 살 수 없고,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고,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살 수 없고, 예배당은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지을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눅12:15)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단의 거짓말,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믿기보다 사단의 거짓말을 더 믿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6:16)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
거짓을 죄로 인정하십시오. 이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하며 합리화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로 인정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자기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남의 일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하려는데 힘써야 합니다. 나의 모습, 나의 상태, 나의 인격, 이러한 것들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다"(잠10:19)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는 더디하라"(약1:19)
경건되고 거룩한 일을 바쁘게 하십시오. 잠언20:19에서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를 경계합니다. 한가한 사람은 거짓말이 많습니다.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과 사귀느냐에 따라 내 인격이 결정됩니다. 모일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며, 아름답고 풍성한 간증을 나누며, 어떻게 주님을 더 귀히 여기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을 것인가,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우리는 점차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잡담과 남의 비난으로 일관된 사람들의 모임 속에 참여하게 되면 내 인격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지며 내 혀는 거짓과 비방, 잡담의 도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참된 것을 말하고 그 참된 것을 사랑 안에서 말하는 훈련을 쌓으십시오. 위대한 사람은 사상에 논하고, 평범한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조잡한 사람은 사람을 말한다.
주님 앞에 열납될 수 있는 말을 하십시오.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을 주님이 들으시면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먼저 던져 보십시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가서 확인하기까지는 남에 대한 어떤 나쁜 말도 믿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사실인가? 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좋은가? 꼭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사실이 아닌 것은 무시해 버리십시오. 다른 이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에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어떤 말이 사실이 아닐 때,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리십시오. "주여 내 혀에 파수꾼을 세워 주십시오"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탐심은 볼 수 없는 죄입니다. 탐심은 죄의 욕망이며 죄악의 동기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고 있는 죄입니다. 내적인 사고와 정서와 더 관련이 깊은 죄입니다.
탐심은 신앙 성장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탐심의 죄가 내 영혼을 물들게 하면 영적인 식욕, 즉 말씀의 맛이 없어져서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가 자라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재리의 유혹, 물질에 대한 욕심과 허영 때문입니다.
탐심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 네 가진 것을 다 팔아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이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탐심이 행동의 범죄를 가져오는 첫번째 단계는 생각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감정의 영역에 들어와 마음 속으로 먼저 즐기기 시작합니다. 셋째로 우리 의지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 한번 해 볼까 하는ㅣㄹ 유혹을 갖게 합니다. 네번째로 행동 직전에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뭐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야, 누가 그것을 범죄라고 말했는가?
자족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핌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거룩한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욕심이 있다면 나쁜 욕심은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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