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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질문입니까?

by 헣푸로 2022. 5. 3.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하기란 힘들다. 짧은 순간의 즐거움일수도 있고 오랜 시간 지속되는 참된 삶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로든 기분 좋은 것을 뜻한다. 항상 바라는 행복이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행복하냐고 물어봐야 대답을 한다.

"내가 행복한가?" 이런 망설임이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행복할 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행복할 때 더 이상 행복을 갈구하지 않고 따라서 행복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한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당신의 행복은 멈출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존 슈마커는 "소비자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행복 찾기에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기쁨의 순간을 뒤쫓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는 행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행복은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마치 손안의 모래처럼 흩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급하게 행복을 찾기 때문에 급하게 행복을 지나쳐버린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옛날에는 가난하긴 했지만 더 행복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여기에 진실이 있다.

현대의 '웰빙 well-being'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훌륭한 삶'이나 '행운의 축복을 받은' 등의 의미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에우다이몬(웰빙?)은 어떤 의미로든 '좋은' 삶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축복을 받은 삶, 즉 사랑하는 가족과 건강한 육체가 있으며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인생 말이다.

가장 소중한 기억들, 다시 말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을 때, 내가 창조적인 작업을 끝마쳤을 때, 타인의 인정을 받았을 때, 내 친절한 행동이 누군가를 웃음 짓게 했을 때, 소프트볼에서 멋진 수비에 성공했을 때, 노을빛이 수면에 반짝이는 멋진 광경을 문득 보았을 때였다.

행복했던 이 시간들은 내가 행복을 구했기 때문에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다. 행복은 부산물과도 같다. 행복은 도망 다니는 나비와 같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 같다. 덧없고 아주 우연히 다가 온다.

인생에 대한 허무와 우울로 악명 높은 철학자 니체는 말한다. 행복의 열쇠는 가장 최소한의, 꽃잎처럼 연약한, 공기처럼 가벼운, 도마뱀의 재빠른 움직임 같은 숨결과 순간을 음미하는 거라고.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나?

예, 이 대학에서 공부하기에 충분히 영리합니다!

 

왜 영어에서 '하느님(God)'과 '나(I)'라는 단어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쓸까?

고유명사는 항상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 때문이다. 고유명사가 있다고 해서 어떤 존재가 실재한다는 증거나 그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슈퍼맨도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지 않는가?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신 god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첫글자를 대문자로 쓸 수 없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단어는 단지 대문자로 써야 하는 인칭대명사이다. 아마도 부정관사 a를 제외하면 영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 글자로 된 단어이기 때문에 소문자로 쓸 경우 불충분 해 보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가장 간단한 대답은 '내 정신'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과 지각한 것이 그냥 진짜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도 나와 다르지 않은 정신을 지닌 또 다른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도 나처럼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컴퓨터도 양심을 가질 수 있을까?

양심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컴퓨터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기 앞서 해결해야만 할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컴퓨터가 자기 자신을 충분히 인식해야만 죄책감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거고, 둘째는 컴퓨터가 이로 인해 정말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거다. 컴퓨터가 진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위해서는 '친구의 친구를 상랑했네'라는 노랫말의 비도덕성을 씁슬하게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직함'은 법률의 어느 부분에 속할까?

게임이론의 고전적인 예인 '죄수의 딜레마'

두 명의 용의자가 체포되어 각기 다른 방에 구금되었다. 증거가 불충분한 경찰은 제안을 한다. 만약 그 중 한 명이 상대방을 범인으로 지목하면 진술자는 풀어주고 범인으로 지목당한 자는 10년 형을 받게 된다. 두 명이 모두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그들은 각각 6개월 형을 받는다. 만약 두 명 모두가 상대방에 대해 증언을 한다면 두 명 모두 5년형을 받게 된다. 최고의 '전략은 상대가 당신을 배신할 것으로 생각하고 당신도 증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 당신이 받게 될 최고 형량은 5년이다. 상대방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면 그냥 풀려날 수도 있다. 많은 사회 이론가들은 현실의 사람들이 정직함을 진실로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본다.

 

지구 반대편까지 구멍을 뚫고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판 구멍 중 가장 깊은 구멍은 러시아 콜라반도에 있는 시추공이다. 지면으로부터 12.262킬로미터를 뚫고 들어갔다. 1970년부터 굴착을 시작해 너무 뜨거워 파지 못하게 될 때까지 24년간 작업을 지속했다. 이 시추공도 지구 지름의 겨우 0.1퍼센트 미만을 파 내려간 것이다.

구멍에 공기가 차 있다면 공기의 밀도는 지구의 중심으로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구멍으로 뛰어든 당신은 처음에는 지구의 중력이 당기기 때문에 점점 빨리 떨어질 테지만 곧 종단속도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중력에 의한 가속도와 증가하는 공기의 저항은 평형을 이룬다.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 추락 속도는 느려지게 된다.

만약 구멍에 공기가 없고 지구도 정지해 있다면 공기의 저항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당신의 엄청난 가속도를 잡아 줄 것은 없다. 지구의 중력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구의 중력은 떨어지는 방향으로 나를 더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야'고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당신은 지구의 표면이 아니라 지구 중간에 들어와 있음을 기억하라.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질수록 당신의 등 뒤로 더 많은 지구의 질량을 두게 되고, 이것이 중력으로 작용해 당신을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이 중력 브레이크 효과는 지구의 중심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당신을 멈춰 세우게 된다. 지구 중심의 중력 가속도는 제로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끌어내리는 중력과 뒤로 잡아당기는 중력 사이의 평형점에서 멈추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떨어지던 관성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이 평형점을 지나서 멈추게 되고, 그러면 평형점을 향해 거꾸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관성 때문에 평형점을 약간 지나쳐버릴 테고, 이러한 몇 차례의 왕복운동 끝에 마침내 평형점에서 정지하게 된다. 지구의 반지름이 6,400킬로미터이기 때문에 나는 이 평형점이 아마도 그 4분의 1 지점인 1,600킬로미터쯤에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왜 바닷물에는 소금기가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바닷물은 소금물이 아니다. 소금을 이루는 다양한 화학 성분들이 용해되어 있을 뿐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자연 원소는 바닷물에도 들어 있을 확률이 높다. 35퍼어밀이란 1킬로그램의 바닷물 안에 35그램의 염류가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비율을 전체 바닷물의 양에 대입해 계산하면 지구의 바다 속에는 모두 합쳐 5경 톤이라는 말도 안 되게 많은 양의 소금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에 바다에 녹아 있는 소금을 모두 추출한다면 지구 전체를 약 150미터 두께로 덮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바다의 염도는 위치마다 다르다. 염도가 가장 높은 바다는 페르시아 만의 홍해였다. 가장 낮은 염도의 바다는 발트 해와 북극해였다. 따뜻한 바다에서는 염도가 높다. 수분의 증발이 빠르기 때문이다.

원래의 바다는 민물에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염분이 점점 쌓이면서 짠맛을 더해가게 되었다. 바다로 흐르는 강물과 해저의 열수분출공, 그리고 해저화산이 바다에 소금을 공금했다. 매년 전 세계에서 대략 40억 톤의 소금이 강물을 통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학자들은 이밖에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해 바다가 짠맛을 갖게 되기까지는 2~3억 년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계산한다. 강물이 바다를 묽게 하지는 못한다. 민물의 들어온 만큼 해수면에서 수증기가 증발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왜 더 짜지지 않는 걸까? 스스로 염도를 유지하는 일종의 균형 상태에 들어갔다고 여겨진다. 매년 강을 통해 들어오는 염분과 거의 비슷하나 양만큼의 소금이 응결되어 해저에 가라앉는다

 

3리터짜리와 5리터짜리 물병으로 4리터를 만들 수 있는가?

5갤런 물통을 가득 채운다. 이 물을 따라서 3갤런 물통을 가득 채운다. 이제 큰 물통에는 2갤런의 물이 남았다. 3갤런 물통의 물을 모두 버린다. 큰 물통에 남은 2갤런을 작은 물통에 채운다. 이제 작은 물통에는 1갤런이 들어갈 공간만 남게 된다. 5갤런 물통에 다시 물을 채운다. 이 물을 따라 작은 물통을 끝까지 채우면 큰 물통에는 4갤런의 물만 남게 된다.

-2 * 3 + 2 * 5 = 4

3갤런 물통을 세 번 채우고 5갤런 물통을 한 번 비워도 된다.

3 * 3 + -1 * 5 = 4

 

공장 굴뚝은 왜 그렇게 높은 것일까?

연기를 하늘 높이 올려 보내 바람에 빨리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굴뚝을 통해 상향 통풍이 불길을 잘 살려주기 때문이다. 높은 굴뚝이 상승기류를 잘 만들어내는 이유는 굴뚝 안과 밖의 압력 차이 때문이다. 화염의 열기가 배출 가스, 즉 연기를 팽창시켜 밀도를 낮추면 이 연기는 굴뚝을 따라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굴뚝을 가득 채운 배출 가스의 압력은 바깥 공기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굴뚝 밑동에 통기구를 만들면 자연히 강력한 공기가 불길로 유입되고, 이것은 다시 불을 더 활활 잘 타오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굴뚝 효과'라는 것이다. 굴뚝이 높을수록 그 효과는 더 커진다. 높은 굴뚝은 큰 기압차를 만들고 이것은 강력한 상승기류를 만들며 연기가 빠져나간 자리를 산소가 채운다.

지나치게 높이 세워도 문제가 발생한다.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 다 식어버려 연기가 굴뚝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이미 굴뚝 효과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납고 커다란 동물은 왜 희귀할까?

커다란 육식동물들은 많은 양의 고기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 필연적으로 덩치 큰 포식자의 수는 반드시 그들의 사냥감 수보다 적어야만 한다. 만약에 먹이가 되는 동물의 숫자가 증가하면, 다시 말해 포식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이 늘어나면 포식동물의 숫자도 함께 늘어나게 된다. 포식 동물은 계속해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과적으로 먹이 동물의 숫자를 줄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먹이 동물이 줄어들면 포식 동물의 숫자도 함께 감소한다. 먹을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비율이 다시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자연상태에서는 포식자와 그 먹이 사이의 비율이 적정한 수준으로 잘 유지되는 편이다.

포식자에게 먹히는 동물들도 먹이가 필요하다. 이 질문에서는 먹이사슬이 아니라 삼각형 모양의 먹이피라미드 형태가 더 이해하기 쉬운데, 왜냐하면 먹이가 되는 생물의 개체수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이다. 북극곰 1마리가 10마리의 물범을 먹어야 한다고 해 보자. 물범 1마리는 40마리의 청어를 먹어야 한다. 청어 1마리는 800개 가량의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어야 한다. 동물성 플랑크톤 1개는 2만 4,000여 개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단 한마리의 북극곰을 먹이기 위해 약 80억 개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지탱하는 거대한 생명 피라미드가 필요하다.

커다란 육식동물은 환경변화에 특히 취약하다. 서식지에 어떤 동요가 일 때마다 그 충격은 먹이피라미드 전체를 울리고 가장 위로 모아진다. 최종 포식자들인 덩치 큰 육식동물이 보통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자신도 들지 못할 돌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다면 그 돌을 들을 수 없으니 전지전능하지 않고, 만들 수 없다면 만들 수 없으니 전지전능하지 않다. 두 개념은 상호 배타적이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들 수 없는 돌이 있을 수 없을 뿐이다. 이것은 동그란 네모나 결혼한 총각이나 햇빛 찬란한 밤이나 축축한 사막 같은 예와 동일하다. 무의미한 질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잘못된 논리일 뿐이다. 정답은 "예, 만들 수 있고 또 그것을 들 수도 있습니다." (전지전능하니까...)

우주학자들은 우주가 유한함을 믿는다고 말한다. 무한한 것이 어떻게 한계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영원함이 어떻게 시작과 끝을 갖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역설적이게도 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하느님을 믿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우주를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무언가가 정말로 있는 것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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