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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_데이빗 A. 씨맨즈

by 헣푸로 2022. 6. 29.

사도 바울은 "재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도다"(고전 13:11)

 

언제였든, 어떻게였든 당신은 아이였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소년기 때나 십대 때의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숨어 있는 당신의 과거 아이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좋게든 나쁘게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공적인 모습을 띨 때, 우리는 매우 공손해지고 훈련된 모습이 된다. 거리가 있는 이들과는 항상 매우 성숙하고 합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가까운 인간관계 안으로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정, 사랑, 결혼 또는 매우 두터운 동업관계에서는 얼마나 빨리 내적 아이가 지배해버리는지 모른다. 그는 매우 불합리하고 완고하며 명령적이거나 수줍어하고 겁많고 연약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에 우리 자신이 충격받을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행동이 사건에 비해 과했다면, 당신은 일단 당신 속의 내적 아이가 활동했음을 의심해 보는 게 좋다. 난 내가 방송국의 그 작은 금발 아가씨에게 얘기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난 사건의 재현이었음을 깨달았다. 놀랄 만한 느낌과 감정으로 내 어릴 적의 경험이 내 마음에 떠올랐고,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상처받은 소년의 모든 감정이 그 대화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우리가 내적 아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특히 부부의 애정 생활에서이다. 단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말씀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네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이고 집이 뭔가로 와글와글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인과 또 두 명의 내적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쉬며 우리를 털어놓는 집은, 다시 과거의 아이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편이나 아내의 내적 아이는 재미를 붙이고 집을 뛰어다니게 된다. 이렇듯 그 네 명이 각자의 가정환경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정말이지 흥미로워진다.

 

무엇보다 더 큰 비극은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를 과거에 머물게 하고 아이 같은 반응만 하도록 사슬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정이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사랑을 전달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우린 진실한 행동은 하지 않고 반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가끔 응답하지만 창조적인 사랑에 낯설다. 

 

당신 마음이 잠재의식층을 뭐라 부르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혹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의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인 동시에 위대함이기도 하다. 

 

치유가 필요한 아이는 이 넷 중 하나 꼴이다. 상처 받은 아이, 미움받은 아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아이, 그리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우리를 거의 최면적인 압박과 고통으로 붙잡고 억누르는 기억들은 거의 깊은 감정적 고통, 혐오, 증오 또는 수치심의 기억들이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의 복합이기도 하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기억의 치유는 마음 깊숙한 곳의 적극적 개방과 다른 이들과의 나눔을 필요로 하고 당신 행동을 위한 다른 이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당신은 과거의 아이가 있는 내부의 층에 미치지 못할 상황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치유되기 원하는 부분, 즉 당신에게 고통을 주며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기억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폴 투니어는 이 내적 관찰이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처음에는 특징적인 것들만 보여 "아하, 책상과 의자 뿐이군"이라고 말하게 되지만 어둠에 눈이 익게 되면 온갖 잡동사니로 어질러진 방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뢰하고 진정으로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이와 함께 기도하라. 그와 함께 주님과 대화하듯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바로 여기 계신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아픈 경험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 그분에게 고백하여 각각의 경험들, 각각의 감정들, 각각의 행위들을 그분께 드려 당신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도록 하라. 그분께서 당신의 증오를 닦아내시고 상처를 싸매며, 음용을 제어하고 두려움을 내어쫓으시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그분이 당신을 용서하시듯이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움을 대신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쓰라린 느낌과 자기 연민을 대신하도록 하라. 너무 서두르지 말며 방해받지 않고 급하지 않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조건 붙은 관계

부모들이 바로 평상시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할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먹든, 예의가 바르든, 성적이 좋아지든, 또래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든 간에 우리는 조금만 더 잘하게 되면 인정하고 사랑하리라 약속한다. 그러다가 사랑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조건 붙은 관계와 행동 성향이 큰 성공을 이루어냈어도 자신이 아무것도 한게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더 잘 해봐'라는 모토만큼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함을 훼방놓은 것도 없다. 더 잘하라는 모토의 시스템은 하나님, 이웃, 자신 이 셋에 대한 모든 사랑을 합선시켜 놓는다. 이것은 당신이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누가복음 15:25~32에 등장하는 아버지를 섬기되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던 맏아들처럼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올바른 자애심 없이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을 미워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콤플렉스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격 전반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억눌려진 욕구와 기억의 묶음'이다. 유해한 아동기의 모토와 연관시켜 볼 때, 콤플렉스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공격이라 하겠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식욕, 안락, 안정, 성욕,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 소속감,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함, 살아야 하는 목적 등 하나님이 주신 욕구들을 대면하게 된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니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6:1)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는 "강하고 조용한 사람"을 추켜 올리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 약골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이 파괴적인 모토를 격려하는 것이다. "주를 찬양합니다!" 외에는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인식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빡빡한 어린아이의 모토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감정이 표면화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표현하든 안하든 간에 그 감정을 갖고 있음으로 자신을 빈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선 안된다"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깊이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목베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마 14:13)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취하는 행동이 아닌가? 우리도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슬픔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인 반응이다. 너무 길지 않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다. 만일 혼자 너무 오래 슬퍼한다면 균형감각과 객관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사람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슬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할 것은 가까운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이다. 또 확실하게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위대한 위로자인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떠나셨다. 또 그분은 타인들의 필요들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도우셨고 고치셨으며 먹이셨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일과 슬픔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셨고, 그 일로 치유받으셨다.

두번째 사건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께선 그분의 슬품을 울음으로 표현하는데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볼 때 예수님은 매우 공개적으로 우셨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예수님이 하신 것은 기도였다. 우는 것이다.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 친한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 기도하는 것, 부활과 천국에 대해 얘기하는 것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적이 있는가? 안식일에 손 마른 한 사람을 고치시려 할 때였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막 3:5)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쫗으실 때에도 그분은 노하셨을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분노란 죄가 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실 죄가 되는 감정이란 없다. 단지 감정의 죄된 사용이 있을 뿐이다.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감정이다. 선을 추구하는 본능과 손잡은 우리 모든 감정들이 마찬가치이듯, 분노 역시 건전한 영적인 목적을 위해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하여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선을 추구하는 것에도 열심이 없다. 잘못된 것을 미워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실로 당신이 의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노하신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막3:5) 얼마나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분노가 올바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보라. 그것은 이기적이지도 않았고 의로운 목적이 있었다. 그분의 분노는 잘 조절되어 있었다. 거기엔 폭발이나 격분이 없었다.

분노는 꼭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어떤 때는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며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절대 분노를 당신에게서 지우도록 또는 떨어져나가도록 기도하지 말라. 성욕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 같이 미성숙한 것이다. 성질을 없애 달라기 보다도 성령님의 지배 아래 놓여지도록 기도하라. 분노가 일소되기를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으로 분노의 방향을 돌려주시기를 기도하라. "아버지여, 나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나이다. 저의 감정이 바라는 것을 아시나이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셨다"라는 의미에서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소아기적이며 비성경적인 생각을 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동안 좌절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 것이다. 캄보디아의 굶주린 아이들, 인디아의 수백만이 걸인들, 강제 수용소의 그 참혹함, 미국 고속도로 상에서 매년 죽어가는 50,000명의 사람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큰이 아동 학대나 폭력의 피해자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너무 먼 일들이 우리 주변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미망인이나 홀아비 또는 이혼 상태에 있게 되는 것 같이 결혼의 가망이 없어지는 그런 단순한 일일 수 있다. 혹은 아주 가까운 예로 지난 주에 중간고사를 망쳤을 수 있다. 당신은 이런 일들을 악한 것이거나 인간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이나 이기심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또는 사고라고 부를 것이다. 또는 인간과 사회의 죄의 영향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며 완전하신 뜻이라고는 부르지 말자. 어떤 아기가 5층 건물 유리창에서 사고로 떨어졌다면 사람들은 그 아이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나를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고의 경우, 이를 둘러싼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은 곧 중력의 법칙에 맡겨진다. 그분의 법과 규칙은 항상 일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기가 살과 피를 갖고 나오기를 바라시지, 플라스틱이나 고무로 만들어져 나오기를 원치 않으신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좌절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죄나 실수나 사고, 그리고 우리에게 짓는 타인들의 죄들이 잠깐 동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악에 의한 어떤 새로운 환경이나 질병이나 사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구분의 궁극적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다른 채널을 찾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과시하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악한 의도로 예수님 시대의 정부는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완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였다. 그러나 6주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온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만드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역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잠시라도 쉬실 수 없다. 그분의 성격 외에 다른 행동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하거나 죄를 범하거나 악한 것을 꾀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움직일 수 없는 큰 바위를 만드실 수 있을까?"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것으로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부딪친다면 어떻게 될까?" 네모이면서 동시에 둥근 것을, 직삼각형이면서 정삼각형인 디자인을, 백색이면서 검은 것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류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대개의 방법은 인간 최고의 지식과 의학기술을 십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도구를 젖혀두시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치유를 하실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예외이지 규칙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예외를 규칙화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치료법을 개발하여 세상을 정복하기까지 기다리고 계신 듯하다. 왜 하나님은 이것들이 개발되기 전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이 자연의 법칙과 이차적 요인 안에서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지혜롭게 기도하기를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기도했으나 거절당한 채 죽었다. 하박국은 성루 위에서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시편 기자는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듣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되는 그의 '육체의 가시'인 육체적 장애를 없애주시기를 세 번 기도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는 그것의 최고가 되며 그가 최고로 만들어지기 위한 '족한 은혜'를 약속받았다. 응답되지 않는 우리의 기도의 이유들을 살펴보자. 우리가 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고 있다. 로마서 8:26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그리고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썼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용된 말은 카이로스이다. 이것은 "때가 차매"(갈 4:4) 등 예수님의 강림에 대한 어구와 같이 바른 시간, 정확한 때를 의미한다. 

어린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즉석에서의 만족을 바라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 아직 어린아이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을 상대로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감정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중 사랑, 희락, 화평은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감정적인 살미 온전한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지난 밤 잠들기 전에 느낀 감정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아침에 일어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에 대해 아무 이유도 찾아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감정이란 지극히 가변적이고 신뢰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 영과 더불어 성령이 증거함에 있어 감정이나 느낌이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정말 그것들은 거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이 절대 그 중심이 될 수는 없다. 

패배하고 우울에 빠지고 불안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늘 자기 자신에게 "기분 어때?"라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를 당신 감정 위에 세우는 것은 영적 유아기의 증표가 된다. 성숙에서의 확실한 길은 무드와 감정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감정에 사로잡히기 전에 진리르 구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감정 우선주의의 사람에게는 특히 더 특별하게 훈련이 요구될 것이다.

인도 선교사 안나 모우 수녀의 우울한 날에 독백하는 내용이다.

. 어젯밤은 잠은 충분했나?

. 고의건 아니건 간에 남에게 상처준 일이 있나?

. 분노라든가 자기 연민을 느끼고 있는가?

이 세 가지에서 그녀의 영적 소화불량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그냥 웃어 넘겨버린다고 했다.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웃음인가. 그리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아 안나 우울해 있으려면 맘대로 해. 난 주님과 있을 테니"

어느 때건 간에 당신은 당신의 모든 사상과 감정의 총합보다도 더 큰 존재이다. 당신의 자아는 당신이 가진 어떠한 감정도 초월하며 그 위에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 아니요"라는 말은 내가 사라지거나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내 안에 계시고, 내 삶은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삶인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그 큰 갈등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슬픔 속에서 땅에 엎드려 감당하셨던 고난이었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하셨는가? 오래 전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자기 포기를 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의 의지가 아버지의 의지와 일치되지 않았었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이며 내 뜻은 하나님의 뜻이고 내 기쁨은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예수님의 감정과 의지 사이에 깊은 갈등이 그대로 있음을 볼 수 있다. 자기를 포기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미를 안다. 대부분의 위대한 성자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고 또 계속해서 거쳐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감정적 고통을 아무런 부끄럼없이 받아들이셨다는 흥미로운 점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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