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욕망과 이기심의 노예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시시각각 그 욕망에 잠식되고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솔직하게 만든다. 그렇게 때문에 겸손은 그 본질에 있어 문명의 소산이고 오만은 야만의 소산이다. 그 문명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실은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덧없고 외롭고 고통받는 존재 일반에 대한 연민과 공포, 그리고 그 존재 일반 중에서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연민과 공감일 것이다. 측은지심이 요구하는 자기희생의 정도가 극단에 이르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연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대상에 자기 자신을 심어 넣는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서 자라고 있는 것은 개별자로서의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일부인 존재 일반에 대한 연민이다.
지성은 결국 가치의 문제이고 영혼의 문제이다. 지식과 학위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행복이 주위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고 느끼고 사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사는 것보다 행복하다.
평범한 둔재들을 위해 칭찬을 유보해놓아야 한다. 칭찬은 그들의 몫이다. 천재는 그의 빛나는 역량 자체가 이미 보상이다. 황금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지상의 찬사를 구해서는 안 된다.
좀 더 도덕적이 되기 위해 새로운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종교 내에서 얼마든지 더 도덕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 원칙이고 교리이다. 그것이 달라야 한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보리스 가일로프였다.
그녀의 남편은 반체제 인사였다.
남편은 공산당의 부패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고 자유세계가 그의 꿈이었다.
결혼한 지 사 년째 되던 해에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결단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는 껍데기뿐인 소련의 권위를 포기했다. 그리고 볼세비키 혁명의 궁극적인 실패를 선언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그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이 시작되었다.
보리스는 그의 이념의 궁극적인 승리를 환호했다. 퇴근 때나 휴일에는 키에프 독립광장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자유 체제로의 이행을 연설했다. 보리스는 단지 열렬한 분리독립주의자이며 낭만적인 자유주의자였을 뿐이다. 보리스는 성급했다. 고르바초프는 소연방의 개혁과 개방을 원했지 민족국가로의 해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독립 광장에는 비밀경찰들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독립 국가연합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실패로 끝난 실험장이 되고 말았다. 그 실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성장과 몰락은 모든 국가의 운명이다. 아테네 제국도 몰락했고 로마도 몰락했다. 미국도 결국 몰락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몰락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긴 채로 몰락하는가이다. 소련은 아무것도 남겨놓지 못한 채로 몰락하고 있다.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먹고살 만한 중산층의 반대 때문에 실패로 끝난 실험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혁명으로서는 성공했다. 그러나 항구적이고 유의미한 정치 체계의 정립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러시아 국민들은 몇 명의 몽상가와 거기에 동의한 군부의 힘으로 왕정을 타파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로의 길을 걸었다. 왕정을 타파한 프랑스가 자본주의의 길을 걸은 것과는 반대로, 애초에 러시아 혁명 자체가 사회주의 국가 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식 사회주의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나의 인생은 실패였고, 계속해서 실패해가고 있다. 행복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살기보다는 관찰하려 했고, 느끼기보다는 느낌을 이해하려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진실과 겸허와 소박함을 촉구했지만 먼저 나 자신에게 그것을 촉구했어야 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왜 나는 이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 행복과 기쁨조차도 두려워했다.
무의미한 삶을 견딜 수 없어 했다는 점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삶의 대부분의 행로를 무의미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구하지 않고 사는 오늘의 삶을 견딜 수 없어 했다는 점에서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너무도 진지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상념으로 가득 찼다.
표상은 실재를 부른다는 구석기의 주술을 암시적으로 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보행자 신호로 바뀔 때만다 화려한 옷들이 길을 건넌다.
눈은 소리를 흡수한다. 귀가 멍멍하다. 연인들의 속삭임이 그들 세계에만 갇힌다. 그들은 모두 먼 세계의 요정이 된다. 침묵속에서 눈만 천천히 내리고 있다.
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시시각각 느끼고 산다. 이 삶이 언제까지 가능한 것일까?
조지, 당신은 착한 사람이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그것이 당신의 가치와 매력이야. 그러나 이번만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스스로의 행복을 고려해줘.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줘
나는 자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내 안타까움에 대해 아무 답변도 듣지 못했고 공감과 이해의 호소 없이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구원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때 이래 내가 말한 것은 명제뿐이었다. 사실 외에 말할 것은 없었다. 해명이란 구걸 외에 무엇이겠는가.
나스타샤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남길 것은 없었다. 나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포기했었다.
당신은 말하자면 고양잇과에 속하는 사람이야.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거만하고 도도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이지. 나는 이를테면 갯과에 속하는 사람이야. 어울리는 게 좋아. 당신의 감촉도 좋아하고,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우리 삶에서 구하는 커다란 동기는 그것이 살 만한 것이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느낌이고 신념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도 없고 가치 있을 수도 없고 또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도 없다. 삶이 그에게 고통만을 줄 때 그는 증오심을 품고 그의 인생을 망쳐 나간다. 증오심은 우리에게서 분별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복수심만을 가져다 놓는다. 영혼은 복수심으로 마비된다. 나는 나스타샤에게 용서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아니카와 보리스만 고통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스타샤는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세상에는 수없는 불행이 있다. 나까지 불행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내가 보리스의 불행 때문에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면 소말리아 내전의 희생자 때문에도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 교수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 말을 가로채거나 질문을 연거푸 해대는 버릇은 없다. 남의 말을 가로채는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똑똑하거나 남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교수는 드물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요청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에 대한 요구를 유난히 많이 가진 아이가 있다. 이러한 아이에게 삶은 유쾌한 것이고 주위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불행한 상황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질을 가진 아이는 불요불굴의 정신력을 갖춘 어른으로 자라난다. 행복할 줄 아는 아이만이 행복을 구해 나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아이는 웬만해서는 불행에 의해 꺾이지 않는다. 타고난 낙천적 기질이 불행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보리스와 아니카의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먼저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보리스가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겨내야겠다는 각오와 결의를 내 마음속에서 불러 일을켰던 것은 보리스의 건강과 나스타샤의 행복이었다.
캐나다에는 알코올 중독이 만연해 있다. 캐나다는 외로운 사회이다. 개인주의적이고 선진적인 사회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인간적 유대는 없다. 캐나다는 가족 외에 같이 살아 나갈 사람이 별로 없다. 웰드릭의 '웰컴 왜곤' 프로그램은 캐나다적 삶의 외로움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오만한 자기 포기 속에 살아왔는가를 알게 되었다. 불쌍한 영혼들이 영원 속에 던져놓은 그 희망을 몰랐다. 영혼 불멸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일차적인 것은 거기에 거는 우리의 희망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어리석었다. 단지 내게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없었을 뿐이었다. 절실한 소망이 없었다.
우리 무의식은 기만적 위안을 용납하지 않아.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한 상태에서는 자살하지 않아. 조증 상태에서 투신하지. 슬플 때 기쁜 음악은 위험해
우리는 시내 중심가에 호텔을 잡고 매일 루브르와 노트르담에 갔다. 나는 학생들과 매튜에게 끝없이 설명했다. 앙투안느 와토, 랑크레, 루벤스,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르미자니노 등에 대해. 그렇게 피렌체와 로마와 뮌헨과 암스테르담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암스테르담에서 모두 감동에 젖어 있었다. 릭스 박물관에는 렘브란트와 할스와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있다. 네델란드의 시민계급에게는 허장성세가 없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소박하다. 이 그림들이 그의 기질에 잘 맞았던 것 같다. 할스 앞에서 걸을을 떼지 못했다.
"이름 좀 말해줄래?"
"조지 가일로프입니다. 선생님"
우리는 행복할 때 시간이 정지하기를 바란다. 시간을 독촉하는 것은 현실이 참기 어려울 때이다. 고대의 노예들은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랐다. 아니카여, 천천히 자라라. 주위를 네 아름다움으로 비춰라.
"선생님,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나스타샤가 보리스의 병이 낫고 아니카가 자랐을 때 자기에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스타샤는 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영혼은 불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스타샤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다시 두근거릴 그날에. 육체에서 해방된 우리 영혼들만의 그날을
영혼은 결국 소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나스타샤와 더불에 땅을 덮는 먼지가 될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날 것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해줄 것이다. 많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세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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