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칼의 노래] 김훈

by 헣푸로 2022. 8. 22.

책머리에

정의로운 자들과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당대의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세상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그 분명한 끝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귀 기울이면, 사각 사각 사각,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내 적들이 노 저어 다가오는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나는 자꾸만 고개를 흔들어 그 환청을 몰아내곤 했다. 서울에는 봄비가 내렸고 한강 밤섬에는 안개 속에서 살구꽃이 피어 있었다.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내 칼은 보이지 않는 적을 벨 수 없었다. 나는 두개골 속이 가려웠다.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키고 싶었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우수영의 가을 물빛은 날카로웠다. 먼 산과 먼 섬들의 갈묏 빛 능선이 도드라졌고, 바람의 서슬은 팽팽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바다에서, 저녁마다 노을은 투명한 하늘 위로 멀리 퍼졌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일본 천하의 맹수가 다케다 신겐이라는 또 다른 맹수의 진영을 모조리 죽이고 일본을 차지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의 칼에 죽었다. 그러자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정권의 수뇌부를 몰살하고 일본의 관백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마음속에서 히데요시는 또 다른 길삼봉이었다. 알 수 없었고 벨 수 없었고 조준할 수 없었다. 벨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다만 적의 종자를 박멸하려 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제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ㅇ낳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히데요시가 전 일본의 군사력을 휘몰아 직접 군을 지휘하며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풍문 앞에 조정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 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 준것은 결국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바다는 전투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고 함대와 함대가 부딪히던 물목은 늘 아무 일도 없었다. 빛이 태어나고 스러질 뿐, 바다에는 늘 아무 일도 없었다.

 

고니시 부대의 대장 깃발은 붉은 비단 장막에 흰색으로 열십자 무늬를 수 놓았는데, 그 열십자는 고니시가 신봉하는 야소교의 문양이라고 안위는 보고했다.

 

적은 집중되고 나는 분산된다. 집중된 적은 분산된 나를 향해 쏜다. 적의 화력은 집중에서 분산으로 흩어진다. 분산된 나는 집중된 적을 향해 쏜다. 나의 화력은 분산에서 집중으로 모인다. 적은 전방위를 쏘고 나는 한 방위를 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