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예수님 (삼상16, 왕상2)
다윗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 토대였다. 다윗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적이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인다운이라는 단어가 동의어였다.
위험, 부모, 적, 친구, 연인, 자녀, 아내, 교만, 창피, 거절, 형제 자매, 병, 죽음, 성, 정의, 두려움, 평화 등. 기저귀, 팩스, 아침 식사, 교통 혼잡, 막힌 하수관, 부도난 수표 같은 것.. 이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의 전면과 후면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 문제는 단순히 천국 전문가들이 살균 처리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다윗과 사울 (삼상16:14-23)
사울이 잔인한 블레셋 족속과 야비한 아말렉 족속을 얼마나 멋지게 대파했는지를 말해 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울이 비록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녔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표지들을 발견한다. 그는 점점 일 자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 자체는 잘 풀려 갔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사울은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저질렀고, 사무엘은 이를 지적하며 사울과 맞섰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그 두 번의 불순종은 죄가 아니었다. 부도덕하거나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두 번의 행동은 모두 지극히 사리에 맞는 행동이었다.
여기서 흥미롭고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그 두 번의 불순종이 모두 예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저지른 불순종은 사울이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투를 준비시킬 목적으로 임의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었고, 아말레과의 싸움에서 저지른 불순종은 사울이 -아말렉과 그 모든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행동이다. 사울은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하나의 방법으로 대우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과 예배, 예배와 일이 완전히 일치를 이룬 삶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시다. 인간의 일은 일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 후 20여 년 동안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 20년 동안 그는 왕처럼 보이지 않는 왕이었던 것이다.
통치는 우리가 하는 일의 내용이며 섬김은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방식이다. 모든 선한 일은 참된 주권적 통치의 발현이다. 그리고 그 주권을 가장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섬김이다.
좋은 일을 맡았다고 해서 좋은 일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맡은 옳은 역할이 우리가 옳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의 일이나 지위가 의롭다고 해서 우리가 의로운 것은 아니다. 똑같은 일을 수행하는 데 사울은 실패했고 다윗은 성공했다. 직업은 중요하다. 일은 중요하다.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열쇠,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는 삶의 열쇠는 어떤 직업이나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가 그 일을 왕업으로 행하느냐이다. 왕업을 해하는 사람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휘파람을 불며 일한다.
다윗과 요나단 (삼상18-20)
다윗이 경험했던 적대감은 항상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적대감, 바로 선에 의해 유발된 적대감이었다. 사울은 다윗이 선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첫 번째 살해 시도는 다윗이 사울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의 연주 실력 때문이었다. 다윗과 그의 연주는 사울에게 치유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치유 대신 증오심이 생겨났다. 불 같고 비이성적이며 살인적인 광기는 점점 침착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살인 음모로 발전했다. 다윗을 계속해서 위험한 전쟁터로 내몰아 결국 블레셋인들의 손에 죽도록 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한 항의한다. "내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느냐? 내가 무슨 몹쓸 일이라도 하였느냐? 내가 자네의 아버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이 이토록 나의 목숨을 노리시느냐?"
사울은 여섯 번에 결쳐 다윗을 없애려고 했다. 세 번은 창을 던져서 죽이려 했고, 두 번은 처음에는 메랍과 그 다음에는 미갈과 결혼시켜 주는 조건으로 블레셋인들의 손에 죽을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으로 몰아넣었으며, 한 번은 암살단을 보낸다.
다윗과 도엑 (삼상21-22)
거룩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타자성과 순전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경험을 근거로 추정하는 최고의 인간상 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인간상을 확대하거나 투사시칸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다. 심지어 확대된 최고의 인간도 아니다. 하나님은 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다윗은 놉에 있는 아히멜렉의 성소로 달아났고 거기서 거룩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아마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하나님을 주목하는 삶을 지속하고 하나님이 그의 안에 일으키신 기름부음과 섬김과 기도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기 위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다윗은 거짓말로 제사장을 안심시킨다. 다윗의 삶은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삶이다.
다윗은 빵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지만 그 제사장에게는 빵, 적어도 보통 빵은 없었다. 대신 제단에 올리는 빵 곧 거룩한 빵(전병)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밀로 빵을 열두 덩어리를 만들어 제단에 열을 지어 차려 놓았다. 한 주가 지나면 새 빵을 갖다 놓았는데 전 주에 만든 빵은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그 빵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히멜렉은 종교 규정을 접어 두고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주었다. 아히멜렉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소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 규정의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을 간파할 줄 알았던 그는 다윗에게 빵을 내어 주었다.
다윗은 빵을 먹은 후 제사장에게 무기를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무기가 있었다. 바로 골리앗의 칼이었다.
그 날 놉의 성소를 방문한 사람은 다윗말고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다윗이 들어오는 모습,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 거룩한 빵과 거룩한 유물(골리앗의 칼)을 받아들고 떠나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다. 그의 이름은 도엑이었다. 에돔 사람 도엑, 성경 본문은 그를 사울의 신하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를 사울의 근위대 대장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도엑은 다윗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사울이 다윗을 총애하다가 발작이 일어나면 죽이려고 덤벼들던 것을 보앗따. 그는 그 날 어떤 종교 의식을 행하기 위해 그 성소에 와 있었다. 아마도 속죄 의식이나 정화 의식 같은 것을 행하고 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는 다윗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엑은 그저 적당한 교인이었다. 그에게 종교와 종교에 관련된 일들은 그저 직업적, 정치적 이득을 위한 것일 뿐이다. 도엑은 놉에서 보았던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사울은 놉에 있던 아히멜렉과 모든 보조 제사장들을 심문했고, 그들을 자신을 대항해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민 자들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노라고 정당하게 항변했다. 왜냐하면 다윗의 거짓말로 인해, 아히멜렉은 자신이 다윗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 깨문이다. 그러나 사울은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사울의 신관과 종교관은 완전히 뒤틀리고 완전히 자기 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에 따르면, 제사장의 임무는 도망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왕을 비호하는 것이다. 성소는 배고프고 쫓기는 사람들이 도움을 얻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면하고 국가의 전통을 보존하는 길가의 사당에 불과하다. 사울의 군사들은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에 불복했다. 부하들이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사울은 도엑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도엑은 그 명령을 따랐다. 그는 무방비 상태의 제사장 85명을 살육했고 더 나아가 그 마을 사람 전체(여자들, 아이들, 가축들까지)를 학살했다.
엔게디의 다윗 (삼상23-24)
엔게디는 사해 옆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로서 이스라엘의 남동쪽 외딴 곳에 있는 소금물 호수다. 거기서 서쪽으로 270미터 정도 가면 높이가 600미터 이상인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다. 그 고원과 절벽은 심한 침식으로 골이 파여서 복잡한 협곡과 동굴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곳이 바로 엔게디 광야다. 넓디넓은 황무지인 이 곳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험하고 황량한 지역일 것이다. 하이에나, 도마뱀, 대머리수리 등이 당신을 맞아 준다.
광야에 있은 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감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소음도 없고 짐승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얽히고 불안정한 삶의 연결 망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인식이 발달한다. 거룩에 대한 감각이 생겨난다. 신성함이 드러난다.
다윗은 스스로 원해서 광야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로 쫓겨간 후 광야가 진리의 장소, 아름다움의 장소, 사랑의 장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다윗이 광야에서 보낸 세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에 속한다.
광야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할 임무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으며 그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다. 그저 깨어 있고 그저 살아 있으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광양에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삶이 단순해지고 깊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며칠 혹은 몇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자신이 좀 더 자신다워지고 정리되고 자연스러워진 것을 느낀다.
광야는 또한 겁나는 곳이기도 하다. 광야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이다. 폭풍우가 일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하늘은 순식간에 악마의 얼굴로 돌변한다. 멋진 자태를 보이던 동물도 순식간에 사나운 살인마로 변할 수 있다. 다채로운 빛깔을 반사하며 보는 이를 즐겁게 해 주는 산 개울이지만, 발 한 번 잘못 디디어 빠지면 순식간에 우리의 몸을 찬물로 얼려 버린다. 광야는 순식간에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수없이 가지고 있다.
다윗의 엔게디 광야 이야기는 다른 두 개의 광야 이야기고아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하나는 모섹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시내 광야를 지나가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유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아야기다. 광야는 사험의 장소이며 유혹의 장소이다. 모세의 광야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분간하는 법을 훈련 받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배웠다. 광야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것들 그리고 궁극적 근본 즉 하나님과 대면한다. 이 대면은 시험이요 유혹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이 시험의 결과, 우리는 더 나아지기도 하고 더 나빠지기도 한다. 성장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다윗은 더 나아졌다. 다윗은 성장했다.
다윗의 광야 생활에 대해서는 열다섯 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잇다. 그 초기 이야기 중에 엔게디 근처의 광야 동굴에서 다윗과 사울이 만난 이야기가 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젊은이 몇 사람이 사해의 절벽에 나 있는 어느 동굴에 숨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 입구 쪽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그가 사울 왕임을 알아보고 대경 실색한다. 이만큼 가깝게 추적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온 사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그 때 그들을 찾을 목적으로 거기에 들어 온 것이 아니라 대변을 보려고 들어온 것이다. 그는 그들을 향해 등을 보이고 앉는다. 다윗고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은 상황을 파악한다. 다윗의 젊은이들은 곧 행동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조용히 그들을 저지한다. 대신 그는 동굴 벽을 따라 조심조심 사울의 옷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가서 몰래 그 겉옷 자락을 조금 잘라 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울이 어느 정도 먼 곳까지 갔을 무렵 다윗은 동굴의 입구에 나와서 그를 향해 외친다. 왕은 협곡 건너편에 있다. 다윗은 외친다. '임금님, 임금님' 뒤를 돌아본 사울은 대경 실색한다. 다위은 말한다. 왜 제가 당신의 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조금 전 저는 임금님이 옷자락을 베는 대신 임금님을 벨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단코 그럴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을 해하려 하겠습니까?
얼마 후 십에 있는 하길라산에서 비슷한 상황이 또 한 번 연출되었다. 야밤에 사울의 진영에 잠입한 다윗은 무방비로 잠에 골아떨어진 사울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그는 손쉽게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무엘서는 다윗이야기의 외면을 말해 주고, 시편은 같은 이야기의 내면을 말해 주는데 이 두가지 면은 피난처라는 단어에서 만난다.
광야 자체는 무대에 불과하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광야에 있었다. 사울은 오로지 다윗을 잡을 생각에 다윗을 쫓아 달려갔고 살인만을 생각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달려가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기도를 하며,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 영광을 받아들이며, 한결같은 사랑과 약속을 지키는 진실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준비했다.
다위과 아비가일 (삼상25)
광야에서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비가일, 다윗은 눈에 살기를 띠고 분에 겨워 펄펄 뛰고 있다. 아비가일은 그의 길을 막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모욕을 당한 다윗은 복수를 하기 위해 격분한 40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복수의 길을 가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단신으로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 아비가일은 길에서 무릎을 꿇고 다윗의 길을 막는다. 지금 다윗에게는 하나님은 없고 자아만이 가득 차 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의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다윗은 광야에서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을 모아 선한 사마리아인단을 결성했다. 강도들이 자주 출몰해서 여행자들을 약탈했고 두둑한 지갑이나 값 나가는 물건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습격하곤 했다. 다윗과 그의 동지들은 광야에서 바로 이런 구조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나발이라는 부유한 목축업자를 알게 된 것도 이 선한 사마리아인단 활동 때문이었다. 다윗은 열 명의 동지를 보내 잔치 음식과 술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1년 내내 나발의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고, 그 동안 음식은 겨우 죽지 않을 정도만 먹었다. 그러나 나발은 그 요청을 듣자 마치 다윗에 대해 처음 들어 보는 양 말하며 그를 광야에 출몰하는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는 잔치 음식을 나눠 주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 동료들을 모욕했던 것이다.
나발의 야비함이 다윗의 속에도 있던 야비함을 건드려 깨웠던 것이다.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나 다윗은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 다윗은 이성을 잃었다. 다윗은 광야에서 배운 아름다운 거룩을 잃어버렸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재빨리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녀는 잔치 음식을 가득 싸서 나귀에 싣고 중간에서 다윗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녀는 다윗을 보자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얼굴을 땅에 대며 말했다. "부디 제발 간청하오니 참아 주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자가 하실 만한 행동이 못 됩니다." 다윗은 멈추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얼마 후 나발은 세상을 떠났다. 다윗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아비가일에게 사람을 보냈고 청혼했으며 마침내 그녀와 결혼했다.
시글랏의 다윗
다윗은 20대 시기를 현상금이 붙은 지명 수배자로서 광야에서 보냈다. 십 광야, 마온 광야, 엔게디 광야, 바란 광야 등
광야는 지리적인 실재인 동시에 영적인 은유다. 모세에게는 시내 광야가 있었다. 예수님께는 유대 광야가 있었다.
사울 왕을 피해 홀로 도망치던 다윗은 사울의 적이었던 블레셋 족속 가드의 통치자 아기스 왕에게 망명했으나 이는 허탕이었다. 다윗은 아기스 역시 사울을 대적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미친 척해서 겨우 죽음을 면한 그는 재빨리 아둘람 굴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는 그리 오래 혼자 있지는 않았다. 오래지 않아 4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모습이었다. 우선 형들과 온 집안이 그 곳으로 왔다고 되어 있는데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사건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은 장남 엘리압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형제들이 차례대로 다 거부된 다음이었다. 또 몇 년 후 다윗이 집에서 먹을 것을 싸 가지고 골리앗과 대치하고 있던 사울 군대의 형들을 찾아왔을 때, 엘리압은 버럭 화를 내고 욕을 퍼부으며 그를 멸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600명까지 불어난 공동체가 가드의 아기스 왕과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전에 홀로 망명했던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왕, 더더구나 블레셋 나라 왕과 말이다. 그 세기 내내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첫째 가는 적이었다. 다윗은 광야 생활의 마지막 16개월 동안 블레셋의 지역에서 그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살았다. 다윗은 적국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그들에게 철저히 사기까지 친다. 그는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 행세를 하면서 매일깥이 이스라엘 마을을 노략질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오랜 적인 남방 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아기스 왕과 나누었는데 왕은 그것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약탈품인 줄로만 안다. 아기스 왕은 그토록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군사 동료를 얻게 된 것을 기뻐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도시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다윗은 블레셋 나라 가드의 경제법에 따라서 살았을 뿐 아니라 그 나라의 도덕법에도 맞추어 살았다. 화자가 말하는 바는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윗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햐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이다. 아기스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문화에 굴복해 살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그들 중에 있지 말고 나오라 구별된 백성이 되어라"는 명령이 여러 번 되풀이된다.
다윗은 아기스를 위해 일하면서 자신과 군대가 머무를 수 있는 도시 하나를 달라고 요청했다. 아기스는 그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시슬락은 다윗의 기지가 되었고 가족과 병사들을 위한 그의 교회가 되었다.
도덕주의는 영성에 대해 죽는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 여부만을 강조하는 접근 방법이다. 도덕주의는 모든 상황에는 우리가 분별하고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분명한 옳은 것이 정해져 있다는 확신에 입각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영성이란 전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해서 도덕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짓눌러 버린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비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세속주의 역시 영성에 대해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이 매일의 삶의 우선적 배경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거기에 자기 자신을 더 잘 맞출수록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접근 방법이다. 세속주의는 영성이란 근본적으로 내세 지향적으로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 삶에 무의미하다는 확신에 입각해 있다. 영성이란 경제적 수완, 직업적 노하우, 사회적 교양이라는 세상적 기본에 덧붙여진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소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세속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경멸한다.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는 시글락에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갈 때면 나는 늘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그 곳의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여 더불어 일하고 예배했다. 이내 실망을 느끼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였다. 소곤대는 자, 불평하는 자, 신의 없는 자, 변덕스러운 자, 의심 많은 자, 죄에 찌든 자, 따분한 도덕주의자, 홀리는 세속주의자 등.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들어 온 한 줄기 빛나는 아름다움이 그들 위에 비칠 때면 나는 그 동안 죄로 어두워진 내 눈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드시고 성령님이 창조하신 삶들 곧 희생적인 겸손, 믿을 수 없는 용기, 영웅적 미덕, 거룩한 찬양, 고난 중의 기쁨, 끊임없는 기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들을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다.
브솔 시내의 다윗
브솔 시내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다윗과 600명의 부하는 가족과 아이들을 무방비 상태의 시글락에 놓아 두고 군사 작전을 위해 가드의 아기스 왕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 때 이스라엘과 오랜 숙적 관계에 있던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로 갔고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다.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600명은 비탄에 휩싸였고 그 비탄은 다윗을 향한 거대한 분노로 돌변했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고 마을을 무방비 상태로 떠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다윗을 죽여야 해"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 시글락에 닥친 재앙은 우선 사람들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다윗은 그의 목사 아비아달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외부 세계가 온통 허물어져 내리는 와중에 그는 내면 세계로 되돌아가 자신의 중심적 정체성을 다시 세웠고 자신의 기초를 회복했다. 다윗의 계획은 기도와 상담으로부터 나왔다.
다윗의 600명 부대는 아말렉 약탈자들을 추적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태였다. 먼 전선에 나가 블레셋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폐허가 된 시글락의 모습에 사기가 한 없이 꺾여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다윗에게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다윗의 계획은 전혀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다윗은 그들을 분발하게 해서 남쪽으로 진군을 강행했다. 24킬로미터를 힘겹게 가자 그들은 브솔 시내에 도착했다. 그 지점에 이르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명의 부하는 더 이상은 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탈진했다. 다윗과 400명은 그들을 남겨 두고 시내를 건너서 황량한 사막지역으로 더 깊숙히 들어갔다. 아무리 찾아도 아말렉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쯤 죽은 채 버려진 병든 이집트인을 발견했다. 보살핌을 받고 살아 난 이집트인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에 그들에게 아말렉인들의 거처를 알려 주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하 사람의 아내도 아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빼앗긴 물건을 모두 되찾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알말렉인들이 다른 마을에서 약탈해 온 많은 양떼와 소떼도 덤으로 얻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고 비탄에 젖고 분노에 찾던 사람들은 이제 기쁨에 겨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다윗을 높이며 우러러 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윗의 공로로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전리품이다!"
그 400명 중에는 인색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나약한 동료들과 전리품을 나누어 갖자는 말에 불끈 반발했다. 바로 그 때 다윗이 나섰다. 그의 이러한 개입이 바로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 도중 하차해서 뒤에 남아 시냇가에서 물건이나 지켰다 그 200명이나 목숨을 걸고 싸움터로 나가 싸운 400명이나 모두 동등하며 그러므로 모든 것을 동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감상이 자비를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감상은 실제 인간 관계로는 연결되지 않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감상이란 허울 뿐인 자비심에 불과하다. 국기의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 생겨나는 애국심 같은 것이 바로 감상이다. 결코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실제 애국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단순한 감정 말이다. 감상은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은 병든 친구를 찾아가 보는 일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동정을 느끼며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비탄을 느낀다. 그러나 속으로는 동정을 느끼고 눈물을 조금 흘리고 자선 단체에 만 원 정도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토록 삭막하고 살벌한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온정 많은 사람이란 말인가! 눈물만 흘렸을 뿐 그 불쌍한 사람들의 이름은 알려 하지 않은 채, 딱하다고만 여겼을 뿐 그 가련한 죄수들을 찾아가 볼 생각은 없이 동정만 느꼈을 뿐 그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한 통이라도 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러고는 이중 자물쇠로 잠긴 집에 들어가 낯선 사람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 자아 성취에 대한 이야기와 책이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아 성취에 도달한 개인은 가장 적다는 사실이다.
내게 편지를 쓰면서 가끔씩 "브솔 시내에서 친구가"라는 말로 끝을 맺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준 적도 없고 나 역시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는 바로는 그녀는 아마 자신을 브솔 시내에 남았던 200명 중 하나라고 여기는 듯하다. 전진하기에는 너무 지쳤고 힘이 소진되었기에 방관자아 된 듯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놓였으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감히 기대하지 못했던 관대한 다윗의 판결을 듣는 사람 말이다. 바로 브솔 시내에서.
비가를 부르는 다윗
시편의 70퍼센트는 비탄의 노래다.
다윗은 사울의 증오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살았다. 위험, 역경, 외로움, 상실 모두 사울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보다도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바로 그것이었다. 다윗은 이것을 인정했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했다.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
북쪽 사울 궁정의 아브넬과 남쪽 다윗 궁정의 요압이 바로 그들이다. 히브리 민족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다. 각 지파마다 강한 독자적 정체성을 가졌는데 보통 그것이 '히브리인'으로서의 집합적 정체성보다 더 우선했다. 강력한 외부 민족의 침략이 있을 시에는 지파적 차이를 접어두고 히브리인으로서 단결했지만,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는 곧 지파적 정체성으로 돌아가곤 했다. 북쪽에 위치한 열한 지파는 때때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고 유달리 개별적인 정체성이 강했던 남쪽의 커다란 지파 유다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강력한 블레셋의 위협이 있었기에 사울은 그들을 하나의 연맹으로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이 추방당하자 그의 고향 지파 유다는 비록 연맹에서 탈퇴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다윗에게 호의적은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러다 마침내 사울과 요나단이 죽자 유다 지파는 즉시 다윗을 유다의 중심 도시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유일한 후계자인 40세의 이스보셋에 의한 존속된 왕실을 중심으로 명목적으로나마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브넬은 사울 군대의 사령관이었으며 요압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아브넬은 극도의 기회주의자다. 그는 국왕 옹립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여 힘없는 이스보셋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면서 미래는 다윗에게 있다는 깨닫고 북쪽 지파들(이스라엘)을 다윗 쪽으로 회유하기 시작한다. 이는 새로운 정부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아브넬은 자신의 책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며 이스보셋을 협박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구슬린다. 그는 아주 세련되게 교활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교묘히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반면 요압은 전형적인 억세고 거친 사람이다. 그는 일단 죽이고 나서 나중에 생각한다. 또한 그는 소위 이상주의자다. 아브넬과 요압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 연못에서 만난다. 아브넬은 연못의 이쪽에, 요압은 연못의 저쪽에 진을 친다. 그들은 각기 열두 명의 군사를 앞으로 보내 일종의 무예 경연 대회를 벌이기로 한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스물네 명 모두 죽고 만다. 기브온 연못에서 아브넬과 요압이 벌인 무예 시합 대회는 곧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사이의 격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번졌다.
성경에는 왜 자꾸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아브넬이나 요압 같은 얼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읽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스루야는 다윗의 여동생이고 아들이 셋 있었다. 요압, 아비새, 아사헬. 크게 패했던 기브온 연못 전투에서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여 스루야의 아들은 둘이 되었다. 아브넬은 어쩔 수 없이(아브넬은 아사헬을 말렸지만 아사엘은 아브넬을 끝까지 추격했다.) 그렇게 한 것이다. 수년 뒤 요압은 외교상의 문제를 의논하자며 아브넬을 속인 다음 아비새와 합작하여 그를 잔인하게 죽였다. 아사헬은 수년 전에 죽었고 이제 아브넬이 죽었다. 스루야의 남은 두 아들 요압과 아비새는 다윗에게 가시 같은 존재로 끝까지 등장하고 있다.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살해하자 다윗은 목놓아 울며 말한다.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더 강하니 비록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고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약하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못 읽겠어. 특히 구약 말이야 싸움하는 이야기, 잔인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러나 사실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접하는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 비열함과 기회주의와 종교적 폭력과 종교적 선전 조작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를 너무도 힘들게 만드는 많고 많은 스루야의 아들들의 세계에서 말이다.
다위과 예루살렘
동쪽과 남쪽으로는 급경사가 져서 깊은 골짜기로 이어져 견고한 천혜의 수비시설을 이루었고 다른 방향을 따라 비탈진 평원을 오르려고 해도 두 개의 거대하고 흉측한 형상을 만나 멈추어 설 수 밖에 없다. 그 기괴하고 흉측한 형상이란 도시의 북쪽 벽과 서쪽 벽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는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뒤 불구가 된 절뚝거리는 야곱을 닮은 흉측한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년에 시력을 잃어 아내와 아들에게 사기를 당했던 눈먼 이삭을 닮은 흉측한 형상이었다. 이 벽에 가까이 다가가면 느낫없이 그 형상들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고 땅 밑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거대한 소리와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벽으로 둘러싸인 여부스는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라고 불렸다. 실제로 여부스인들은 평화롭게 살았다. 다윗은 그 곳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했다. 다윗이 보기에 그 곳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에 완벽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곳은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과 남쪽 유다 지파를 연결하는 척추와 같은 곳에 위치했으며 어느 편의 소유지도 아니었다.
얼마 전 다윗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분열되었던 지파들이 하나가 된 지금, 새로운 정부를 위한 새로운 중심지가 있어야 했다. 현재의 수도는 헤브론이지만 그 곳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의 충성을 확보하기에 어려웠다. 그렇다고 남쪽 지파를 남겨 두고 북쪽 이스라엘 지역으로 옮겨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루살렘이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 곳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경계 지역에 위치했으며 지금껏 어느 쪽도 점령해 본적이 없는 작은 요새 형태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 벽의 거대한 형상은 사실 악마가 아니라 훌륭한 수력 공한으로 작동되는 기계의 형태라는 결론이 나왔다. 다윗은 여부스족 요새 예루살렘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지시는 간단했다. 첫째, 수도관을 박살내라. 그러면 그 흉악한 형상들이 동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뒤 그 야곱/이삭 형상들, '절뚝발이와 소경'을 박살내고 그 파편들은 벽 너머로 내던져라. 다윗이 성취한 가장 쉬운 승리였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승리였다. 예루살렘의 어원인 '평화의 도시'에 걸맞는 승리였다. 그 도시는 또 '시온'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내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난해한 본문을 재구성해 본 적이다.
다윗은 사울의 오랜 적대감에도 비참해지지 않았으며, 블레셋에 대한 과도한 악감정 속에 갇히지 않았고 이득에만 집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으며, 과거 업적의 명성을 우려먹고 사는 나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애정 때문에 탈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갈등과 적대 관계, 그 모든 축복과 놀라운 일, 그 모든 미움과 사랑은 거룩한 삶으로 변형되었다. 즉 하나님 안에, 기도 안에, 순종 안에 확고히 자리 잡은 삶으로 변해 간 것이다. 그의 걸음걸이는 더 커졌다. 그의 포용력은 더 넓어졌다.
단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사람은 위험을 무릎쓰고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삶 속으로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인다. 더 많이 섬기며 더 많이 사랑한다. 우리 문화는 변화로 잔뜩 채워져 있지만 성장은 너무도 찾아보기 힘들다. 매시간 새로운 물건, 모델, 발전, 기회들이 숨가쁘게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은 것들을 진득하고 지혜로운 성장을 위한 재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옛것을 새것으로 바꾸기에 바쁘다. 옛것은 금세 폐기되고 새로 나온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곧 거기에도 싫증을 느끼고 또 다른 유행을 따라가기 일쑤다.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길은 성장이지 변화가 아니다. 성장은 유기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 모두는 우리 삶의 성장 속으로 흡수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7년 반 동안 다윗은 헤브론에서 한 개 지파, 유다의 왕이었다. 그보다 2년 전에는 시글락에서 600명의 게릴라 부대를 이끄는 지도자였다. 또 그 전 대략 8년 동안은 사울의 증오를 피해 달아난 광야의 도망자 신세였다. 그 전에는 사울의 궁전에서 일하는 음악가였고 블레셋인 킬러로 상당히 이름을 떨쳤다. 십대의 절정기에는 전쟁터에서 거인 골리앗을 만나 베어 버렸다. 그가 처음 우리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서 베들레헴 언덕에서 양을 치다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뽑혀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였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읽고 있는 바의 대부분은 사실 다윗 안에 계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성 이야기, 그러나 현세를 사는 영성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하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살피고 거기에 반응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고 계신지 살피고 그에 대해 감사와 순종으로 사는 삶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삶 속에서 깨어 있고 진실하고 가실을 피한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우리 속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이제 다윗의 통치 이야기가 시작됐다. 즉위식에서 사용된 단어는 의미 심장하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라" 왕이라는 칭호가 여기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목자와 영도자라는 단어가 선택되어 쓰인 것은 의미 심장하다.
그의 하나님 경험은 그에게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성숙을 가져온다. 베들레헴의 목동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 것이다.
다윗과 웃사
30년 전 이스라엘은 블레셋인들에게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다.(삼상4)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통치권 확립 작업이 끝나자, 새로운 수도로 법궤를 가져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법궤를 되찾아 오는 길에 그만 그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린다. 법궤가 미끄러져 땅바닥에 떨어질 찰나다(그의 형제 아히오와 함께 법궤 옮기는 일을 맡았던) 웃사 제사장은 법궤가 짐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민다. 그 순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온다. "주 하나님이... 그를 치시니, 그가... 죽었다" 다윗은 운반을 중지시킨다. 석 달이 지난 다음 다윗은 다시 그 일을 추진해서 완수한다. 이번에는 기쁨이 넘치는 경축이 있었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놓인 길은 2,500년 동안 많은 순례자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며 밟았던, 고대의 바로 그 길이었다. 당시 순례자들은 세 방향에서 이 길로 들어섰고, 이집트를 비롯한 남쪽 지역세어 올라 오는 사람들도 연안 평원을 따라 이 딜로 들어섰으며, 시리아를 비롯한 북쪽 지역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연안 평원을 따라 이 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로 접어 들었을 때쯤이면, 여행자들은 이제 목적지까지 불과 80킬로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항구 도시 욥바에서 걸어서 출발하면 다음 날 정오 쯤에는 바알라라고도 하는 작은 마을 기랏여아림에 도착한다. 그 곳은 산등성이의 꼭대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거기서 동쪽으로 넓은 계곡을 가로질러 바라보면 비로소 예루살렘의 모습이 보인다. 기럇여아림은 순례자들이 숨을 돌이키고 여행의 마지막 행보를 위해 기운을 차리는 곳이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조금 안 되고 너비와 높이가 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재질은 나무인데 그 위에 금이 입혀져 있다. 위를 덮는 판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속죄소로 불린다. 속죄소의 양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 모양의 상이 각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날개를 앞으로 펴서 가운데 공간을 덮고 있다. 속죄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었다. 법궤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가져온 십계명 돌판,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절 받은 만나가 담긴 항아리,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 이 물건들은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는 증거였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돌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만나)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지팡이)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법궤는 마법의 상자가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이 그것을 마술적 힘과 행운을 가져오는 물건인 양 다룰 때면, 선지자들은 사력을 다해 그들과 맞섰고, 비인격적인 유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섬기라고 도전했다.
다윗은 바로 이것을 가져오고자 했다. 기럇여아림의 나이 든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30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말이다. 아비나답은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 제사장에게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맡겼다. 아히오가 앞장 서서 황소를 끌었다. 웃사는 그 옆을 따라갔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 왜 하나님은 본문이 단도 직입적으로 표현하듯이 그를 치셨을까?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본문은 우리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때때로 성경은 답변보다 질문을 줄 때가 많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한 지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법궤는 결코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다.
종교는 이런 일의 온상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려 드는 사람들이 지도자 위치까지 오르는 일이 적지 않다. 오래 전 그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의 첫 마음 즉 삼가는 마음과 경외감, 사랑과 믿음의 정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부식되어 문드려졌고 마침내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버린 것이다.
다윗은 법궤 아에서 기쁨에 넘쳐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자와 주권자이시며 목자와 바위셨다. 웃사가 죽자,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냈다. 그는 웃사가 죽은 것만 알았지 그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는 몰랐다. 다윗에게 주는 기쁨의 행렬이 중단되고 장례식 행렬로 변한 것이 보이는 전부였다. 하나님께 화가 난 다윗은 뿌루퉁해지고 삐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이 죽지 않은 것은 화를 내는 다윗은 전에 찬양하고 있을 때의 다윗 못지 않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던 것이다. 웃사는 결코 하나님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너무도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제 힘으로 일을 척척 해 낼 때 우리는 걷는다. 걷는 것은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정상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제정신을 잃을 때, 너무도 충만한 의미를 발견할 때, 자아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때 우리는 춤을 춘다. 다윗은 춤을 추었다.
예배는 우리가 자아 집착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주목하기 위한 전략이다. 예배는 우리가 의도적이로 하나님께 주목하기 위해 따로 떼어 놓은 시간과 장소다. 그분이 그런 시간과 장소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자기 집착이 너무도 뿌리 깊고 고질적이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기 위한 정규적 시간과 장소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그분께 주목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런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때때로 우리는 멋대로 그 시간과 장소를 지배하려 들고 감히 하나님을 그 시간과 장소 속에 가두려 들기 때문이다. 웃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업신여겼다. 왜 좀 더 왕다운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다윗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윗과 나단
다윗은 보통 의미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왕이다.
다윗이 이름 없는 목동으로 자랐던 베들레헴에서 그가 지금 이스라엘의 근사한 왕으로 입는 예루살렘까지는 경우 10킬로미터 미만의 거리다. 하지만 그가 그 노정을 걷는 데는 대략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시련과 불안정, 위험과 갈등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도착지에 무사히 도달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셨고 약속을 이루셨으며 정의롭게 심판하셨음을 깨닫고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감사를 느꼈다. 당연히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소를 지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윗은 그 결심을 그의 목사 나단에게 이야기했다. 나단은 열렬히 찬성했다. 목사들은 하나님께 무언가 받으려고만 하던 신자가 하나님께 무언가 드리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을 사랑한다.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는 "저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어려움 가운데 있기를 항상 기도합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간청하는 훈련을 시키신다. 그 기도문에는 여섯 번이나 간청이 나오지만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한 문장도 없다. 다윗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데 대가였다. 그는 당차고 거침없이 간청했다. 도움, 피난처, 치유, 구원, 구조, 용서, 자비 그리고 성령을 구했다.
너무 감격하면 즉작적으로 판단력 없이 반응하게 되다. 다윗의 제안을 들은 나단은 즉시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은 나단을 잠깐 멈추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제안을 나단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보셨다. 나단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나단은 다윗을 다시 찾아가 어제의 건축 허락을 취소했다. 하나님은 나단에게, 하나님을 위한 다윗의 건축계획이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건축 계획에 방해가 됨을 보여 주셨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세우고 싶다고? 잊어버려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워 줄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왕국을 세우는 중이다. 집을 세우는 이는 나지 네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벌인 일에 휩쓸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왕국이고 이 왕국의 왕은 나다.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소위 집 없이도 잘 지내 왔다. 우리가 할 일은 백성들의 상상력과 삶 속에서 이 왕국의 주권자는 바로 나라는 것을 그리고 너는 나의 왕권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기 위한 왕이라는 것을 분면히 새기는 것이다.
나는 이 때가 다윗이 하나님으로 가득했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한 상태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다윗 스스로 자기 행동의 변화나 마음가짐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 이 비교의 말 속에는 이제 자신은 하나님보다 더 좋은 집에서 하나님보다 더 잘 살고 있으며 자신의 힘있는 지위를 이용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 앞에 꿇어앉아"(삼하7:18) 다윗은 앉았다. 이것은 지금껏 다윗이 행한 것 중 가장 중대한 행동이다. 행동하지 않기로 한 행동. 이것은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도, 사울이 받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존중한 일보다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온 일보다도 더 중대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앉아서 왕으로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권세를 내려놓고 권좌에서 내려와 그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리고 겸손히 나아갔다.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 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수동성이나 체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것은 기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억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는 것, 자신의 계획 대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왕이기를 포기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참으로 순종하는 왕이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다윗은 앉았다. 그 때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이다.
윌터 브르거만은 다윗과 나단 이야기를 가리켜 "사무엘서 전체의 극적, 신학적 중심부... 복음적 신앙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구약 본문들 중의 하나"라고 칭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데가 없는 좋은 의도 때문에 오히려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을 저지를 때 우리는 보통 곧 깨닫고 회계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스스로 우쭐해하고 지도자들과 친구들의 박수 갈채와 칭찬에 고무되어서 그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다윗과 므비보셋
므비보셋은 다윗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다. 므비보셋이 다섯 살이었을 때, 기브온에 있는 사울의 궁전에 끔찍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사울왕과 요나단 왕자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울이나 요나단과 연관된 사람들은 블레셋인들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전히 소탕되지 않은 다윗의 게릴라 부대도 커다란 불안거리였다. 하인들은 모두 살기 위해 도망쳤다. 므비보셋의 유모는 당시 다섯 살이던 아기를 업고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넘어지는 와중에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나 났다. 양발목이 다 부러졌다. 그 후로 다시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마을에 숨어서 절름발이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그를 찾아 로드발에 왔다. 그들은 그를 만나 예루살렘에서 다윗 왕이 그를 찾는다고 전해 주었다. 다윗 앞에 출두하라는 명령에 그는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 선 순간, 사형 선고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그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다윗은 "므비보셋 마음 푹 놓게, 걱정할 것 없다네"
므비보셋은 오래 전에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 사랑을 다짐하는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요나단이 다윗을 도와 사울의 살인 음모를 피하게 해주었을 때, 다윗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요나단과의 의리를 지킬 것이며 요나단의 자손들에게도 같은 사랑을 베풀 것을 엄숙하게 다짐했다.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헤세드"라는 히브리어는 사실 그보다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을 꼭 맞게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기에 우리는 이 사링이 갖는 특징과 점위를 표현하기 위해 그 앞에 형용사를 붙여 사용한다. 변함없는 사랑, 충성된 사랑, 언약을 맺은 사랑 등. 우리는 이런 형용사를 붙임으로써 이 '헤세드'라는 말에 우리가 때때로 부모와 자식, 연인과 친구로서 경험하는 보통 사랑의 특징-애정, 갈망, 친밀감 등-이 포함된 동시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다른 요소들-항구성, 믿음직스러움, 변함없는 헌신, 한결같은 신뢰 등-이 융합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윗은 전에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므비보셋의 농지와 업무를 돌보게 했고 므비보셋을 가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압살롬 반란 사건은 내란이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권좌에서 내쫓고 왕이 된다. 상황은 전적으로 다윗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바는 그 탈출의 밤에 자신의 상전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다윗에게 고한다. 그 후에 벌어진 전쟁에서 압살롬은 죽임을 당한다. 다윗은 환호와 축복 속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이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시바는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탈출할 때 합류한다. 시바의 말은 이것이다. "므비보셋은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그는 배신자입니다. 그는 왕이 될 기회를 포착하고서 그것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 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저는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다윗은 더 묻지 않은 채 시바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지를 시바에게 넘겨준다고 선얺나다. 그러나 여러 날 후 반란이 평정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윗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므비보셋은 자신도 다윗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기 위해 준비했는데 시바가 자신을 배신하는 바람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로서는) 탈 것이 없어서 꼼짝을 못 했다고 말한다. 므비보셋의 행색은 그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확증해 준다.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한 번 갈아입지 않은 듯한 그의 모습은 분명 다윗이 없는 동안 비탄 속에서 지낸 자의 행색이다. 분명 왕으로 옹립되기를 꿈꾸며 지난 며칠을 보낸 사람의 행색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시바인가? 므비보셋인가?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독자들 대부분은 자연스레 므비보셋 편에 서게 되지만 화자는 고의적으로 최종 판결을 보류하고 그럼으로써 다윗의 반응을 돋보이게 만든다. 다윗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따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반대 신문도 하지 않았고 증인을 불러오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도시와 집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이는 독특한 다윗의 특징, 즉 복음의 예기(anticipation)다.
다윗은 지난 며칠 동안 너무도 많은 변절, 너무도 많은 배신을 당했다. 므비보셋 역시 그의 사랑을 저버린 또 한사람의 배신자가 아니겠는가? 친아들에게서도 배신을 당한 판국인데 하물며 합법적 왕위 계승자인 므비보셋이랴?
우리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에게 조차도 상처받을 위험을 무릅쓰고서 사랑을 베풀기도 한다. 이는 복음과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다윗과 밧세바
어느 날 오후 다윗은 근처 집들의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우연히 한 영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는 그녀를 데려오게 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 다음에는 내팽개치듯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다. 그녀의 남편 우리아는 그 때 싸움터에 나가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전갈을 보낸다. 이제 문제를 다루는데 능수 능란해진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그에게 한 달의 휴가를 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우리아는 곧장 집으로 가서 아내와 잠다리를 같이 할 것이고, 그러면 장차 태어날 아이는 당연히 우리아의 아이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충직한 군인인 우리아는 동료들은 지금 전쟁터에서 고군 분투하고 있는데 자신은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윗 궁전의 문간에서 잔다. 계략이 먹혀들지 않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과 함께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낸다. 그 편지에는 요압에게 우리아를 거의 죽을 것이 확실한 전방에 배치시키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요압은 그러한 음모를 내심 반기며 지시대로 실행한다. 다음 날 전투에서 우리아는 전사한다. 애도의 기간이 끝나자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그녀와 결혼한다. 순간적인 정욕의 발동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급기야 극악 무도한 성-살인죄로까지 발전한다.
이 이야기의 복된 전환점은 다윗의 목사 나단이 등장하여 그에게 설교를 들려줄 때다. 나단은 이 일에 능숙하다. 그는 눈치채지 못하게 가만히 먹이에 접근한다. 그는 짧고 단순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많은 양을 가진 부자가 있는데 그는 손님들을 위해 식탁에 올릴 양이 필요하다. 그는 자기 양을 잡지 않고 잔인 무도하게 이웃집 가난한 사람이 가진 한 마리밖에 없는 소중한 양을 빼앗아 그것으로 손님들을 접대한다. 그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간 다윗은 그 부자의 잔인 무도함에 몹시 분개하여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그러자 나단이 냅다 달려든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겨냥하는 초점이다. 당신이 바로 그 남자다. 당신이 바로 그 여자다. 복음은 결코 누군가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당신 자산에 대한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를 향해 초점을 돌리는 것 말이다. 설교의 예술이란, 우리의 삼인칭 방어망을 피해 돌아와서 이인칭으로 냅다 찌르고 그것이 일인칭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단은 이 예술의 명수였다. 다윗은 그 개인적인 도전에 개인적으로 응답한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너무도 자주 짓는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이다. 죄는 언제나 인간의 삶을 왜소하게 만드는데도 그렇게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지을 수 있을 역량이 있다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자유의 본질상 그것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됨이 갖는 양면이다.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라 부르기 어렵다. 강제된 자유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유를 경험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하시려 했다면, 인간에게는 반드시 사랑하지 않을 역량, 자유롭지 않을 역량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선택권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이 어떤 행동 양식으로 표출되든지 우리는 죄인이 된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다윗을 찾아온 나단은 그 날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회복시켜 주었고 동시에 비유 설교를 통해 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다윗의 마음은 녹아 내렸다.
몇 해만 세상사를 관찰해 보면 죄란 대개 그 전 죄의 재연임을 알게 된다. 전 세대의 죄를 이 세대 사람들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부로가하다. 죄짓는 일에는 그다지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용서와 구원은 어떠한가?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용서와 구원은 매번 일어날 때마다 항상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다윗과 압살롬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은 역사상 가장 애처롭고 가장 가슴을 찟는 통곡 중 하나일 것이다.
믿음의 삶, 다윗 같은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에는 역사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무 연고도 없이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압살롬으로 인한 다윗의 비탄은 11년 전 압살롬의 아름다운 누이 다말의 강간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압살롬과 다말의 배다른 형제였던 암논은 다말의 미모에 이성을 잃고 음흉한 계획을 세워 마침내 그녀를 강간하고 만다. 강간 사건을 알게 된 압살롬은 격분했고 누이를 위해 보복을 결심했다. 압살롬은 자제심을 잃지 않았고 냉정하고 신중하게 살인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계약을 실행에 옮길 때가 오자 그는 잔혹하게 암논을 살해했다. 압살롬은 다윗이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범죄가 무마될 수는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살인은 어디까지나 살이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압살롬은 요단강을 건너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로 도망갔다. 압살롬은 3년 동안의 유랑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 때 다윗은 장차 자신이 받을 고통의 중대한 원인을 만들게 된다. 압살롬을 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압살롬에 대한 그의 용서는 비인격적이었다. 그의 용서는 사법적인 행위였지 아버지로서의 포옹이 아니었다. 다윗의 태도는 아마도 정치적 압력과 개인적 감정이 혼합된 결과였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압살롬이 경험한 것은 아버지의 거절이었다. 죄는 죄를 키운다. 다말 강간 사건은 암논 살해 사건을 키웠고, 암논 살인사건은 다윗의 무정한 행동을 키웠다. 다윗은 압살롬의 죄 때문에 아들 암논을 잃었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 압살롬을 잃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들려주신 탕자 이야기처럼 전개되었더라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압살롬을 거절하는 행위는,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풍성히 받았던 것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지속적으로 결연하게 거부한 죄였다. 그는 전에 여동생 강간사건을 부당하게 여겼듯이 아버지의 태도를 부당하게 여겼다. 4년에 걸쳐 꾸민 일이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 왕에 대해 불만을 갖도록 유도하고 추종 세력을 하나씩 모으다가 이제 민심이 자기 쪽으로 기울었다는 확신이 들자 마침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했고 예루살렘과 궁전을 점령했으며 아버지 다윗 왕을 암살하려 했다.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쳤다. 전에 오랜 세월을 보낸 바 있던 그 험난한 광야로 다시 간 것이다.
광야는 다윗의 인격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그의 다윗다움이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윗은 고통 속에서 겸손을 회복했다.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 겸손을 회복했다. "썩 꺼져라! 이 쓸모 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살인마! 더러운 늙은이. 살인마!" 그리고 돌을 던지며 욕설을 더 퍼부었다. 다윗의 부하 지휘관 중 하나인 아비새가 말했다. "제가 가서 그의 목을 베어 오게 허락해 주십시오." 다윗은 그를 제지했다. "시므이가 옳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밤에 그는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자신의 가장 기본적 정체성은 '왕'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 시므이의 저주는 다윗에게서 모든 화려한 겉치장을 벗겨 내고 그의 영혼을 노출시켰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기도를 회복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했다.
아히도벨은 현명한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었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윗의 신임을 받는 조언자로서 믿음직스럽고 사려 깊은 신하였다. 다윗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아히도벨에게 조언을 구했다. 반란이 일어난 밤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했다. 왕국의 미래가 이제 압살롬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히도벨은 사실은 기회주의자였던 것이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자애를 회복했다. 그는 오랫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아들 압살롬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다시 찾았다. 그는 비범한 사람의 능력을 다시 회복했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저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 주시오." 그러나 다윗의 부하 장군 요압은 다윗의 그러한 자애에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전쟁터에서 기어이 압살롬을 죽이고 만다. 노새를 타고 달려가던 압살롬의 멋진 머리채가 나무 가지에 걸렸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그저 감상에서 나온 말이겠거니 생각했는지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잔인하게 압살롬을 칼로 찔렀다.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열 명의 부하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압살롬을 난도질해서 죽여 버렸다.
다윗과 하나님
결말 부분에 이르자 다윗의 이야기는 목소리가 바뀐다.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다윗에 대해 말했지만, 이제는 다윗이 직접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로(노래가 아니라) 이야기를 한다.
다윗이 살았던 그리고 그 이야기가 기록되었던 시대의 문화적 여건은 상당 부분 블레셋 문화와 가나안식 도덕관-다시 말해, 폭력과 난잡한 성문화-이 지배적이었다. 그는 비록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갇히지도 않았다. 다윗이 어떤 여건에서 살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로 적합하지 않은 여건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성, 전쟁과 난잡함이라는 당시의 문화현상들은 오늘날에도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다.
다윗과 아비삭
다윗이 죽었을 때는 숭고한 반응은 고사하고 애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가 죽을 당시 집안은 온통 싸움판이었다. 그러나 아비삭은 예외다. 일흔 살의 다윗은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하인들은 밤새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유지시킬 수 없다. 신하들은 아름다운 처녀를 데려다가 시중을 들게 하고 같이 자게 해서 그의 정력-왕으로서의 정력과 성적인 정력-을 다시 북돋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성적인 능력과 왕으로서의 능력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왕이 성적으로 무능하면 나라와 문화 역시 영적으로 침체되고 생기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만 볼 때 아비삭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성적인 기능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본문에서는 그녀의 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지만, 그녀의 침묵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보인 세 가지 반응 각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죽음에 대한 그 비인간적인 반응들을 말이다. 죽어가는 이들을 대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들, 죽음 앞에 분노하여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까지 망각하는 사람들, 죽음의 신비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결국 죽어 가능 이를 저버리는 사람들. 다윗은 죽어 가면서 신하들, 아들 아도니야, 아내 밧세바에 의해 차례로 버림받는다. 신하들은 이불을 더 많이 덮어 주는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아름다운 처녀가 죽어가는 노인을 소생시켰다는 일화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치료법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왕은 그녀와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시편은 사무엘상하가 보여 주는 '외면적' 이야기에 대한 '내면적' 이야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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