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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여행의 이유 - 김영하

by 헣푸로 2021. 3. 13.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섬바디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허영과 자만으로 화를 자초한 이후부터는 노바디로 스스로를 낮추었고

그 덕분에 고난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밀어넣으며,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인가?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슷한 일을 소설이 한다.

부부관계의 파경을 다룬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 자신의 부부관계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여행은 그저 지루한 고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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