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섭리론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평등한 기회와 사회적 상향 이동 보장이라는 이상은 오래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였다.(미나리)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정치인들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 공허한 말을 지겹도록 반복할 때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심증이 가게 마련이다.
바로 사회적 상승 담론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불평등이 위험수위까지 올라 왔을 때 이러한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빈말은 두 종류의 불만을 낳았다.
하나는 체제가 능력주의적 약속을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불만으로,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한 사람도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졌다.
또 다른 불만은 능력주의적 약속이 이미 지켜졌고, 자신들은 볼 장 다 봤다는 절망에서 우러났다.
후자가 더욱 사기를 떨어트리는 불만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뒤처졌으며 그 잘못은 순전히 자신들에게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가령 행운이나 신의 은총이나 공동체의 지원 덕분에 그 자리에 섰다면 그런 사람이 다른 이들의 운명에 힘을 보태줘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힘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라는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개인 책임을 우선시하는 미국인의 강력한 성향과 불평등을 용인하려는 태도가 '열심히 일하면 사회적 상승이 쉽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노력이 갖는 힘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심은 불평등을 참아내기 힘들게 했으며, 그와 함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도록 했다.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는 교육 시스템의 책임이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란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자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고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부를 이끈다는 것은 비교적 좋아 보인다.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노동계급의 생활을 동정적으로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뛰어난 학력과 실천적 지혜 또는 공동선 실현에 대한 본능주의적 욕구가 서로 그다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런 상승(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능력주의의 옹호론자들은 노력과 수고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들은 고된 일을 해서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의 대가를 누릴 자격이 있고, 그 성실함에 대한 찬사를 누려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노력은 중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음악가라도 오랜 시간 연습을 해야 카네기 홀에서 연주할 만큰 훌륭해질 수 있다. (운칠기삼, 미나리)
하이에크는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복지국가 자유주의
존 롤스의 정의론 "자연적 재능에 따른 소득 불평등은 계층 차이에 따른 불평등보다 전혀 더 정의롭지 않다. 도덕적 차원에서 두 가지는 똑같이 자의적이다."
따라서 참된 기회평등을 달성한 사회라 해도 반드시 정의로운 사회는 아니다.
그에 더하여 각자의 타고난 능력차에 따라 빚어진 불평등까지 살펴야만 한다. (기회의 평등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일부 능력주의자는 기회평등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결과평등이며 그것이 유능한 사람이 유리하지 못하게끔 핸디캡을 지움으로써 억지로 평등을 만드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한다.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이 시장에서 부풀려지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가 나눠가져야 한다. 이를 '차등의 원칙'이라 부른다.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하이에크가 능력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재분배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롤스가 능력이나 자격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 즉 '재분배 요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명문대(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에서 저소득층 출신자의 비율은 2000년 이후 그대로이며 일부 경우에는 오히려 떨어졌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인재 선별기가 끼친 폐해를 바로 잡으려면 직업 훈련에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러 다른 일들 사이에서 무엇을 더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한 재고가 있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 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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